과거 전쟁이 불러온 경제 위기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격을 받은 바레인 시트라섬의 바프코 정유시설에서 9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걸프전 타격, 강한 내수로 ‘방어’
중동 정세 불안해진 이라크전 땐
카드대란·고유가 겹쳐 경기 둔화
공급망 단절된 러시아·우크라전
고물가 더해 성장판 빠르게 닫혀
이란전 장기화 땐 S공포 현실화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이 세계 에너지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번지고 전쟁 장기화 우려가 커지며, 한국 경제가 전례 없는 복합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수출 회복세와 경기 반등의 불씨는 꺼질 위기에 놓였고, 성장은 멈춘 채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한때 1500원을 돌파하고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실물경제와 금융시장 충격이 커지는 국면이다. 과거 전쟁이 불러온 경제위기의 기억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전쟁의 양상과 당시 한국 경제 기초체력에 따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극명하게 갈렸다. 이번에도 전쟁의 장기화 여부와 대내 경제 변수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배럴당 40달러 선에 육박했던 국제유가는 걸프전 발발 직후 오히려 19달러 선으로 급락하며 안정을 찾았다. 미군 중심 다국적군의 전력으로 전쟁이 조기에 종결된 덕분이다.
걸프전 이전 고유가로 성장률이 둔화했던 한국 경제도 전쟁 기간 중 유가가 안정되면서 성장률이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특히, 당시는 연 9%대 고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던 만큼 강한 내수 소비 덕분에 실질 성장률 타격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반면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전쟁 자체보다 그 이후 전개된 중동 정세 불안이 더 큰 변수로 작용했다. 미군 주도의 작전으로 교전은 빨리 끝났지만, 이라크 내 정유시설이 파괴되고 치안 불안이 이어지며 공급망 불확실성이 장기화됐다. 당시 유가는 중장기적인 상승 곡선을 그렸다.
대내 여건도 좋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카드대란’ 여파로 내수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고유가에 따른 비용 상승 압력이 위축된 내수시장과 맞물리면서 기업 경영 환경은 급격히 악화됐고 경기 둔화의 골은 깊어졌다.
가장 최근의 사례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의 전방위적인 러시아 제재로 국제유가가 2022년 평균 배럴당 100달러 선을 돌파했다. 이는 단순한 기름값 상승에 그치지 않고, 산업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가격의 연쇄 폭등까지 불렀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석유화학 업종은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물리적 공급망의 단절은 첨단 산업 생산마저 위축시켰다. 반도체 노광 공정의 필수 소재인 네온가스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국의 대러시아·우크라이나 네온 수입 의존도는 28.3%에 달했다. 전쟁으로 인한 수급 불안은 반도체 생산 차질을 부추겼고, 이는 곧장 자동차와 스마트폰 등 연관 산업 전반의 ‘도미노 생산 중단’으로 번졌다. 이러한 공급망 훼손과 고물가의 영향으로 실물경제의 ‘성장판’은 예상보다 빠르게 닫혔다. 코로나19 기저효과에 힘입어 2021년 6.3%까지 치솟았던 세계 경제성장률은 불과 몇년 만에 3%대로 주저앉았다. 2021년 4.3%를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였던 한국의 성장률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산업 구조의 한계를 드러내며 2%대 초반으로 밀려났다.
이번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여파가 더 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에는 인도·중국 등 다른 국가로 우회 수출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중동의 유일한 수출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됐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3분의 1이 지나는 ‘에너지의 목줄’로, 항행이 중단된 사태는 이번이 처음이다. 씨티 등 주요 국제 투자은행은 호르무즈 해협이 장기간 봉쇄될 경우,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웃돌 것으로 내다봤다. 당장 국내 휘발유 가격은 ℓ당 2000원에 육박하고 있다.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우회하는 대체 항로가 존재하지만, 운송 기간 연장과 물류비 급증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해운업계에 따르면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 6일 기준 1489.19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직전인 지난달 27일 대비 156.08포인트 올랐다.
내수가 여전히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충격을 가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경기 침체기에는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전쟁발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이 겹친 지금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금리 인하 시 물가 상승세가 가속화해 목표를 벗어날 위험이 크고, 금리를 유지하면 경기 둔화 속 물가만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 19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와 원·달러 환율 1500원 돌파라는 변수도 통화정책 선택지를 사실상 제한하고 있다.
정부는 석유제품 최고가격 지정제 도입을 검토하는 등 물가 안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국제유가가 상승세를 지속할 경우 물가 급등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최고가격 지정제가 당장 물가 안정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도 “국제유가가 계속 오르면 정유사는 수출 물량을 늘리려는 유인이 커지고, 이마저도 이달 말 재고 물량 소진이 예상돼 장기적인 효과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