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같은 7-2 승리로 한국의 WBC 8강행이 확정된 날, 문보경 선수 사진을 자신의 SNS 스레드에 올린 A씨는 악플 테러를 당했다. 문보경 선수가 마지막 타석에서 고의로 삼진을 당한 것 아니냐며 대만인으로 추정되는 누리꾼들이 몰려와 험담을 퍼부은 것이다. 당황한 그는 “왜 나한테 그러느냐”고 반박했지만 악플은 줄어들지 않았다.
곧 한국 누리꾼들이 참전했고, 댓글은 ‘혐한’과 ‘혐대만’의 대결로 바뀌었다. 일본, 중국, 동남아, 남미 등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누리꾼들도 가세하며 그의 SNS는 난장판이 됐다.
이달 초 SNS에는 한국을 동남아 국가들이 ‘이지메’하는 밈들이 퍼졌다. 해시태그로는 시블링스(SEAblings)라는 단어가 붙었다. 시블링스는 동남아(SouthEast Asia)와 형제자매(siblings)를 합친 신조어로 동남아 형제자매라는 뜻이다. 지난해 8월 인도네시아 대학생 시위 때 필리핀, 태국 등의 지지자들이 배달앱인 그랩을 통해 먹을 것을 보내주면서 확산된 신조어다. 지난 1월 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한 K팝 공연에 한국 팬들이 반입금지 카메라를 들고 오다가 적발됐다. 현지 팬들이 관람매너 문제를 비판하자 한국 팬들이 온라인상에서 아세안의 외모와 경제력 등을 비하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혐아세안’으로 받아들인 동남아 누리꾼들이 연대해 반격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혐한’ 밈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곧 인도, 남미까지 확산됐다. 다행인 것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에 이슈가 묻히며 글로벌 반한연대로까지는 커지지 않았다는 정도다.
초연결시대를 절감하는 요즘이다. 세상이 인터넷으로 묶이고 인공지능(AI)이 번역을 담당해주면서 세계는 아주 가까워졌다. 내 SNS에, 블로그에 언제든 외국 국적 누리꾼들이 들어오고, 댓글을 남긴다. 몇년째 연락이 끊긴 고등학교 동창이나 하루에 몇마디 나누지 않는 직장동료보다도 이들이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래서일까. 과거보다 감정표현이 직설적이다. 여기에 국가주의, 민족감정 등이 섞이며 ‘혐오’의 단어들이 가감 없이 터져나온다.
원래 혐오는 자기방어 기제다. 한스 게오르크 호이젤이 쓴 <라이프코드>를 보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면 기쁨, 쾌감, 설렘 같은 긍정적 감정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하면 공포, 혐오, 고통 같은 부정적 감정이 커진다고 한다. 호랑이를 만나면 기쁨, 설렘보다 공포와 혐오가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 때문에 마이애미로 가지 못해 실망한 대만 팬은 한국에 대한 혐오가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혐오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쾌감이다. 뇌과학에 따르면 상대를 혐오하면 도파민이 나온다고 한다. 즉 어떤 정당한 이유로 타인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 자체가 우월적 존재라는 인식을 하게 하는 모종의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혐오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우월감을 주는 감정적 만족감’이다. 우려되는 대목이 이 부분이다. 동남아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혐오가 이런 혐오였을 가능성이 크다. 서열에 민감한 요즘 한국인의 정서상 나보다 아래라고 여기는 존재에 적용되기 싶다. 안타깝게도 극우들의 인종, 종교에 대한 혐오와 닮은 구석이 있다.
지난밤 탔던 370번 버스 막차의 승객 절반은 유럽계, 동남아시아계, 중동계 사람들이었다. 겉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 중국, 일본, 몽골 사람까지 치면 3분의 2는 외국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뭐가 즐거운지 이들은 왁자지껄하게 서울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외국인이 왜 이리 많아졌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열흘 앞으로 다가온 방탄소년단(BTS)의 광화문 공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K팝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갈등보다 연대, 미움보다는 사랑, 경쟁보다는 우정을 얘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BTS의 ‘Love yourself’ 시리즈나 블랙핑크의 ‘forever young’ 어디에도 나 혹은 남에 대한 ‘혐오’는 없다.
“한국 야구 정말 대단해요. 8강에서는 한국을 응원하겠습니다. 대부분 대만인들은 저와 같은 생각일 거예요.” 앞서 말한 A씨의 스레드는 이런 글이 올라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저도 대만 좋아해요”라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왔고, 이내 태극기와 대만 국기로 덮였다.
넷상에서 앞으로도 혐오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어떻게 하면 혐오를 극복할 수 있을지 작은 힌트를 얻은 순간이었다.
박병률 탐사기획에디터 겸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