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맘 2년 차,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는 말버릇이 생겼다. ‘더럽고 치사해’다. 밥자리를 만들 때마다 욕을 먹으며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나야 하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인간들은 길고양이가 더럽다고 말한다. 눈에는 눈곱이 끼고, 입에서는 구내염으로 인한 침이 흐르고, 상처가 나서 털이 벗겨지고, 면역력이 약해 피부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더러움은 더러움이 아닌데, 아픔이고 고통인데, 더 따지고 들면 그냥 아픔도 고통도 아니라 인간으로 인한 아픔이고 고통인데, 동네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은 고통을 더러움으로 보이게 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새벽 세 시에 밥을 주러 다녔다. 새벽 두 시의 거리에는 쿠팡 노동자들이, 네 시에는 택시 기사들이 있다. 세 시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 새벽 세 시는 길고양이들만의 시간이다. 인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도망칠 필요도, 겁낼 필요도 없다. 인간들이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결국 찾아내고야 말았다.
새벽 세 시의 고양이들은 숨지 않는다. 당당히 걷고, 소리쳐 울고, 길 한가운데 버젓이 드러눕는다, 뒹군다. 평소에는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캣맘도 이 시간만은 당당하다. 이것은 새벽 세 시의 마법. 이 시간에는 누구도 내가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일에 대해 따지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길고양이들에게 더럽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루 중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 마음껏 안부를 나눈다. 먹는다. 비빈다. 쓰다듬는다.
어슴한 새벽의 골목길, 걸을 때마다 고양이 아닌 것이 자주 고양이로 보였다. 이런 식의 착각은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걸 뜻했다. 새벽 세 시뿐만이 아니라 낮 세 시에도, 밤 열 시에도 길고양이들을 자주 떠올린다. 지나가는 골목마다 떠올린다. 특히나 종량제 봉투를 볼 때마다 더 자주, 강렬하게, 그들을 떠올린다!
‘더럽다’ 보는 길고양이들과 쓰레기
길고양이와 종량제 봉투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골목마다 나타난다. 2.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3. 작은 사이즈와 큰 사이즈가 있다. 4. 노란색과 흰색, 검은색이다.
고양이가 아니라 쓰레기라서 실망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나는 길고양이들만큼이나 쓰레기에도 관심이 많다. 인간들은 그 두 존재를 집 바깥에 밀어두고는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 보내기만을 기다린다. 신기할 정도로 그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더럽게 만든 게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길고양이만큼이나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것은 종량제 봉투에 담긴 쓰레기들이다. 고양이는 숨지만 쓰레기는 숨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쫓겨난 쓰레기들은 쓰레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간다. 더 이상은 갈 곳이 마땅치 않은데도.
쓰레기들이 땅과 바다에 무책임하게 쏟아져 버려지고 있다. 마음먹은 대로 썩지도 못한 채 성이 되고 산이 된다. 바다로 흘러가 섬이 된다. 우주 바깥으로 버린 쓰레기는 쓸쓸하고 위태로운 심정으로 지구를 회전한다. 총알의 7배나 되는 속도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돌고 돈다.
지금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가 위험해질 정도로 버리고 있다. 나 또한 매일 고양이 한 마리 크기만큼의 쓰레기를 버리고 있다. 길고양이의 사료 접시로 사용하는 알루미늄포일, 종이포일, 닭가슴살이 든 폴리에틸렌 비닐 포장, 플라스틱 처리가 되어 있는 참치 캔 깡통과 일회용 종이컵.
새벽 세 시에 배출한 쓰레기는 종량제 봉투에 담는다. 길에서 차린 식당을 파할 때마다 누군가 길에 버리고 간 담배꽁초도 함께 주워 담는다. 오늘도 무사히 인간 아닌 존재들에게 밥을 줄 수 있어서 뿌듯하다고, 고양이들을 만나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고양이 한 마리만 한 쓰레기를 품고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돌아오면 침대 위에 누운 채 생각한다.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언젠가는 쓰레기를 내버리지 못해서 집 안에 쌓아둔 적도 있었지.
그들을 더럽게 만든 건 인간 자신
나는 곧장 쓰레기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쓰레기를 모조리 한꺼번에, 그냥 쓰레기라고 이름 붙이는 건 아무래도 불공평하다고 중얼거렸다. 쓰레기에도 좀 더 섬세한 분류체계가 필요하지 않느냔 말이다. 나는 쓰레기에 따로따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어떤 쓰레기는 미안한 쓰레기, 어떤 쓰레기는 고마운 쓰레기, 어떤 쓰레기는 발을 동동 구르게 하는 쓰레기고 어떤 쓰레기는 뿌듯한 쓰레기다.
새벽 세 시의 고양이 한 마리만 한 쓰레기에는 아름다운 쓰레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따뜻한 쓰레기라는 별명도 붙였다. 새벽 세 시의 쓰레기는 길고양이들을 고통과 병, 죽음으로부터 구원한 쓰레기니까. 이 쓰레기는 아름답다.
최정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