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대흥행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 영월 청령포, 단종 복위를 돕다가 처형당한 금성대군의 신단이 있는 경북 영주 등이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새로운 관광명소가 됐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문화적으로 뜻깊은 장소가 전국 각지에 많다. 부디 영화를 추억하고 역사를 되새기는 발걸음이 더 늘어 지역경제에도 훈풍이 함께 불기를 희망한다.
영화로 단종 못지않게 주목받는 인물이 세조(수양대군)다. 비록 영화에는 세조가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세조에 대한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흥행한 후 그의 무덤인 광릉을 놓고도 여러 악평이 쏟아질 정도라 하니 역대 세조의 평판이 이렇게 나쁜 시절은 없지 않았나 싶다.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잡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꽤 오랜 시간 세조가 ‘명군’인 줄 알았다. 대략 1990년대에 중고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왕권을 확립한 군주.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한글 보급에 힘썼으며, 문무에 모두 능했던 왕. 이렇게 말이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선 깊게 배우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쿠데타의 배경도 당시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세조가 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어찌 됐든 조선왕조는 그 이후에도 수백년을 더 번창했다는 사실이었다.
세조를 명군으로 그려놓은 역사 교과서를 탓하는 것도, 이를 그대로 가르친 역사 선생님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쿠데타를 막연히 미화하던 때였다.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5공화국’은 1987년에 막을 내렸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학교에는 군사독재 정권의 잔재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아침 조회 시간엔 한여름 땡볕 아래 운동장에 도열해 ‘열중쉬어’ 자세로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들었다. 교실에서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를 4절까지 다 외우는 시험도 봤다. 교련복을 입고 군인들이 하는 제식훈련을 받았고, 방독면 쓰는 법을 배웠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들이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이를 미화하고 옹호했던 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들에게 세조는 명군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교실에 전두환 사진은 없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세조에 대한 이 기억들은 ‘가스라이팅’된 것이 틀림없다.
세조를 다시 만난 건 2013년이었다. 공교롭게도 영화 <관상>을 통해서다. 긴말할 것 없이, ‘충격 그 자체’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조의 이미지는 조카의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리 내지는 늑대다. 명군으로 알고 있던 세조가 저런 자라니. 뒤늦게 역사책도 찾아보고, 단종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요즘도 윤석열의 내란(셀프 쿠데타)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한다.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전직) 장군들은 개국공신이 되어 요직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렇게 윤석열 신군부가 열렸다면, <왕과 사는 남자>라는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보나마나 신군부의 사전 검열에 시나리오가 걸렸을 것이다.
<왕사남> 이야기를 하자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정반대로, 폭군으로만 알고 있던 광해군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광해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가 도주한 아버지(선조)를 대신해 전란 중 조정을 이끌며 백성을 돌봤다는 사실,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나름 실용외교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했다는 사실 등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영화에는 명나라의 요구에 못 이겨 명-후금 간 전쟁에 지원병력을 보내기로 한 광해(가짜 광해)가 후금에 ‘부디 잘봐달라’는 취지의 서신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광해가 실용외교를 추구했다는 가정으로 만든 영화적 상상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굳이 떠오르는 이유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파병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파병할 이유가 전혀 없다. 부디 영화에서처럼, 이란에 서신을 쓰는 일은 생기지 않길 바란다.
송진식 전국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