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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 파인 시간

입력 2026.03.19 20:09

지방 소도시에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다가 손때 묻은 칼 한 자루와 도마 앞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칼날은 원래보다 훨씬 짧아져 있고, 그 칼을 받아내던 도마는 가운데 부분이 움푹 패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노동의 기쁨과 희망, 권태와 절망, 삶의 회한 등이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술가가 공들여 만든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 칼과 도마가 내 가슴에 깊은 울림을 자아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평생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노년에 이르러 서울로 이주하기로 작정하셨다. 부실한 살림에 별로 챙길 만한 것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굳이 숫돌 하나를 아주 소중한 보물인 양 짐 꾸러미에 넣으셨다. 가운데가 움푹 팬 잿빛 숫돌, 남들에게는 보잘것없는 물건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마 떠나보낼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었다. 그 숫돌을 볼 때마다 샘가에 앉아 서걱서걱 낫을 가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필요 없을 거라는 사람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삿짐 트럭에 커다란 항아리 몇개를 기어코 실으셨다. 된장과 고추장을 담그려면 꼭 필요하다면서. 전셋집에 그 항아리를 둘 곳조차 마땅치 않았지만 어머니는 날마다 하얀 행주로 항아리 뚜껑과 몸체를 닦곤 하셨다. 지금은 그 숫돌도 항아리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을 마구 휩쓸어가는 시간은 역사를 형성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변화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누적된 사물 혹은 장소가 줄어들면서 삶은 균질화되고 마음 붙일 곳은 사라진다. 철학자 한병철은 “자본주의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단지 계산하기만 한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사라질 때 삶의 의미 또한 발생하기 어렵다. 분절된 시간 경험은 삶의 기쁨과 안식을 앗아간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새것에 집착한다. 낡거나 유행이 지난 것은 가차 없이 폐기한다. 욕망과 충족과 폐기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면서 삶은 더욱더 분주해진다.

모든 것을 쉽게 갈아치우는 대체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사유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깊이 천착하고 숙고하고 숙성시키는 과정은 불필요한 시간 낭비처럼 보인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 편리함과 유용함에 놀란다. AI를 활용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편리함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질문을 던지고 가설을 세우고 논리를 구축하면서 삶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 생략될 때 삶은 피상성을 면하기 어렵다.

인생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할 능력이 퇴화될 때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실현된다. AI라는 지적 노예의 서비스에 의존함으로 인간은 사유의 자생력을 잃어버리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결국 AI에 종속되게 마련이다. AI가 가공한 세계를 소비하는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유의 깊이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납작한 사고와 타자에 대한 배제뿐이다. 아낌과 존중이 가뭇없이 사라진 세상은 위험하다.

숫돌에 낫과 칼을 가는 작업은 지루하고 반복적이다. 날의 각도를 맞추고 힘의 강약을 조절해가며 가끔 그 서슬을 살피는 과정은, 도구와의 대화를 넘어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의식에 가깝다. 하얀 행주로 매일 장독을 닦는 일 또한 안에서 익어가는 시간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살림이란 그런 느린 시간의 축적이며, 그 축적된 무게가 삶에 안정성을 더해준다. 그런 시간의 두께가 사라진 자아는 작은 흔들림에도 쉽게 휘뚝거리기 마련이다.

움푹 파인 숫돌의 허리나 장독을 닦던 하얀 행주에는 효율성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생의 서사가 깃들어 있다. AI가 모든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우리에겐 자신만의 숫돌에 사유의 날을 벼리는 ‘움푹 파인 시간’이 소중해진다.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대체 불가능한 삶의 흔적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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