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AI 허브(HUB)가 한국에 온다고 한다.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이주기구(IOM),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식량계획(WFP), 유엔개발계획(UNDP) 등 주요 6개 기구와 의향서를 맺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 전례 없는 소식을 큰 기회로 만들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유엔은 왜 한국을 파트너로 택했을까? 몇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미국의 유엔 기구 탈퇴와 그에 따른 자원 부족이다. 트럼프 정부는 66개 유엔 및 국제기구에서 탈퇴했다. 미국은 유엔 정규 예산의 22%를 감당해온 최대 기여국이었다. 대부분의 기구가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두 번째는 내부 역량의 부재다. AI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각 기구들끼리도 AI 도입이 산발적, 이질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세 번째는 글로벌 AI 거버넌스의 구조적 공백이다. 미국과 중국 양대 거인의 거친 헤게모니 다툼 속에서 실행력 있는 보편적 합의는 부재한 상태다.
미국 지원 줄며 대체지 한국 부상
주도적 다자외교 경험 쌓을 기회
자원과 공간 제공에 그치지 않고
AI 의제·인사·발언권 만들어내야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이 새로운 선택지로 부상했다. 유엔 기구들이 대한민국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재정적 대안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처럼 정치적 조건을 강하게 붙이지 않으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공여국으로 평가된다. 둘째, 비서방 선진국으로서의 정당성이다. 한국은 기술 선진국이자 미들파워로, 많은 개발도상국의 롤모델이다. 셋째, 실질적인 AI 기술 역량이다. AI 실증의 실험장 역할을 충분히 제공할 기반을 갖추고 있다. 넷째, 지정학적 위치다. 미·중 경쟁이 AI 거버넌스 논의를 왜곡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양측과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며 중립적 대화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대한민국은 제국주의 경험 없이 선진국이 된 유일한 나라다. 주도적인 다자외교의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이 한계를 직시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건물을 제공하는 나라와 ‘의제’를 제공하는 나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껏 데려와서는 부지와 자금을 제공하는 호스트에 그친다면 10년 후 이 허브는 그저 한국 안에 있는 유엔 사무소에 그치게 된다.
유엔 AI 허브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부족한 이 외교적 경험과 역량을 배우고 채워가는 기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몇가지를 정리한다.
첫 번째, 진짜 게임은 인사다. 어떤 나라가 각 기구의 핵심 포지션에 자국민을 배치하느냐가 의제를 결정한다. 우리는 국력에 비해 국제기구 고위직을 경험한 인력이 적다. 당장 국제기구 진출 인력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10년 후를 내다보고 지금 20~30대를 훈련시켜야 한다.
두 번째, 소프트파워의 핵심은 규범을 정의하는 능력이다. 영국이 국제 금융, 법률, 언론 분야에서 강한 이유는 표준을 먼저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 허브에서 AI 윤리, AI 거버넌스의 언어를 선점해야 한다. 단순히 건물을 제공하는 호스트가 아니라 개념을 정의하는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건물을 제공하는 나라와 ‘의제’를 제공하는 나라는 다르다.
세 번째, 자금을 내는 만큼 발언권을 확보해야 한다. 의제 설정, 연구 방향, 주요 포지션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기여금을 설계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수십년간 해온 방식이다.
네 번째, 글로벌사우스와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의 압축 성장과 디지털 전환 경험은 개발도상국에 진정한 학습 모델이 될 수 있다. AI 허브를 이들을 위한 역량 강화 공간으로 설계하면, 한국은 장기적으로 넓은 지지 기반을 얻게 된다.
다섯 번째, 마침 한국도 공공의 AI 전환을 위한 국가 전략을 수립 중이다. 이 모델을 국제표준에 맞게 제대로 만든다면, 유엔 AI 허브와 함께 쓸 수 있다. 유엔은 기구 간 분절과 기술역량 부족이라는 장벽을 넘어가고 싶어 한다. 우리도 부처 간의 분절과 정부 내 AI 인력과 지식의 절대부족을 겪고 있다. 글로벌 표준에 맞춰서 함께 제대로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 국내의 우수한 AI 기업들이 활발히 참가하게 만들면, 안방에서 우리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문이 크게 열릴 것이다.
제네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10년, 20년을 내다보는 긴 호흡으로, 전략적 발걸음으로 전례 없이 찾아온 외교적 기회를 제대로 잡아 나가자.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