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한민국 헌법은 너무 바꾸기 쉬운 법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모두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헌법을 바꿨다. 5년 단임제를 담은 1987년 개헌안은 이러한 독재를 막기 위한 시도였다. 이후 약 40년이 지났다. 권력 연장은 막았으나 권력의 집중은 막지 못한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40년간 지켜봤다. 1987년 이후 8명의 대통령 중 4명이 구속됐고 2명의 대통령의 경우 아들이 구속됐다. 민간인과 국정을 논의한 박근혜 전 대통령, 여소야대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비상계엄이라는 잘못된 방법을 동원한 윤석열 전 대통령은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두 번의 큰 경고음이 울렸지만,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 헌법이 너무 바꾸기 어려운 법이 되었다는 점이다.
2017년 실패 사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국회는 개헌특위를 가동했고 87년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다. 결과는 ‘실패’였다. 기본권 강화, 지방분권 명시, 권력구조 개편 등 헌법 전체를 바꾸겠다는 거창한 생각, 모든 것을 한 번에 합의하겠다는 시도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실패 후 다시 7년, 2024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가 벌어졌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통령과 국회의 극한 대립을 유발하는 87년 체제의 구조적 결함이 대통령의 내란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독재를 막기 위해 합의한 5년 단임제가 시간이 흐르며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보는 승자독식의 정치를 낳았고, 정치의 부재 때마다 시민들은 광장에 나서야 했다.
2026년은 2017년과 달라야 한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제안한 3가지 과제 우선 개헌은 현실적 대안이다. 헌법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 수록, 국가의 지역균형발전 책임 명시, 국회의 계엄 통제권 강화. 이 3가지는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공약수다. 헌법 전문에 부마 민주항쟁 정신도 넣자는 이재명 대통령의 제안도 대한민국의 정신이 시민 항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서갈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방법이다.
무엇보다 국회의 계엄 통제권 강화가 중요한 키워드다. 정치의 승자독식 구조가 낳은 끝단이 계엄이라는 폭거였다면 그 입구를 막는 것부터 개헌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2월 국회사무처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회 승인 없는 계엄은 자동 무효’로 하는 개헌에 77.5%가 찬성한 사실은 개헌 논의를 ‘계엄 방지’에서 시작하자는 제안이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시민의 생존과 직결된 방어 기제임을 보여준다.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인공지능과 노동 기본권,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성평등과 기후위기 등 낡은 사회계약으로는 현재의 변화와 새로운 갈등을 담아낼 수 없다. 검찰총장이라는 명칭을 두고 벌어지는 소모적인 논쟁조차 낡은 계약 속 시대에 뒤떨어진 언어로 싸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2월 조사에서 ‘합의 가능한 의제부터 단계적으로 개헌을 추진하는 방식’에 69.5%가 찬성했다. 거대 담론에 빠져 시간을 버리기보다 합의 가능한 지점부터 하나씩 매듭을 풀어 나가자는 것이다. 가능한 것부터 바꿔 나가는 성공의 경험이 쌓일 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시민계약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임아영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