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술과 담배를 끊듯 유튜브도 끊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폐허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별’처럼 챙겨 보게 되는 채널이 있다. 함돈균의 뉴스쿨이다. 문학비평가의 언어가 ‘무사의 칼’보다 더 날카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시사 비평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듣다 보면 결국 더 오래 남는 것은 문학비평이다. 시인 이영광의 산문집, 한강의 시집, 카뮈의 <결혼, 여름> 같은 작품을 풀어내는 방식이 그야말로 ‘죽여주게’ 좋다.
아마 제임스 볼드윈의 말일 것이다. 사회가 제공하는 ‘정해진 답’이 우리를 잠들게 만든다고 했던 건. 그는 예술의 목적을 “정해진 답에 가려진 질문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함돈균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잠들게 하고 눈멀게 하는 뻔한 ‘답’을 문학과 예술, 철학과 교육으로 깨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다. 그 믿음은 거의 ‘종교’에 가깝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할 듯한 신념처럼 강력하다. 솔직히 이런 비평가는 처음 본다. ‘소명’이 왔을 때, 누가 다치고 누가 공격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풀스윙으로 쏟아붓겠다는 태도다. 잠든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문학비평가라면 왠지 알쏭달쏭한 말을 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의외로 함돈균의 말투는 간결하고 단호하며, 담백하게 선명하다. 그래서 종종 놀라게 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해요. 율법 필요 없어. 족보도 따지지 말고 의롭게 행동하고 서로 사랑하면 돼. 그럼 끝!”
예수를 너무 간단하게 설명해서 깜짝 놀랐다. 아, 그런가? 예수를 옆집에 사는 목수 아저씨처럼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껴도 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예수가 신의 아들이어서 그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를 옆집 목수 아저씨처럼 다정하게 느낀 사람들 덕분에, 예수는 하늘의 허상을 거부하고 지상의 찬란한 생명력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실존하게 된 거다.
문득 떠오르는 예수의 그림이 있다. 피터 도이그가 2023년에 발표한 ‘알피니스트(Alpinist·고산등/Crucifixion·십자가형)’다. 분홍빛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몽환적인 색채가 십자가형에 처한 예수의 형상과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잊을 수 없었던 그림이었다.
피터 도이그가 오랫동안 머물던 트리니다드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죽음을 상징하는 예수를 배치한 것은, 일상의 평화와 전쟁의 비극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공존하는 세상의 모순을 보라는 의미일까. 매일 전쟁의 공포와 마주하지만, 그것이 나의 고통이 아니기에 어딘가 ‘핑크빛 두려움’처럼 느껴지는, 꿈같은 평화를 말이다.
최근 피터 도이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케이트 부시의 음악과 함께, 이제는 비틀스처럼 친숙한 아이콘이 된 예수의 십자가형 그림을 다시 주목하게 만드는 영상을 올렸다. 케이트 부시가 노래하듯, “신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함돈균과 제임스 볼드윈, 그리고 피터 도이그가 한목소리로 말한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그림이 스스로를 그려가듯, 남들이 정해준 답이 아니라 ‘당신만의 질문’으로 답하라”고. A, B, C 중에 꼭 하나를 골라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런 바보 같은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