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에 관한 저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베버리지 보고서이다. ‘무덤에서 요람까지’라는 말은 누구나 안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상징하는 이 말은 1942년 12월1일 영국에서 베버리지 보고서가 출간되고, 다음 날짜 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의 헤드라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출간된 이 보고서는, 종전 후 영국을 비롯한 다수 국가가 복지국가로 전환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이 보고서가 처음부터 복지국가 구축의 그랜드 플랜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사회보험 제도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도입되었기 때문에 빈구석이 많았다. 엉성한 사회보험 제도를 조금 가다듬을 목적으로 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위원회 활동 결과를 담는 보고서로 기획되었다.
대다수 정부 위원회의 역할은 구색 맞추기이다. 정부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비난을 피하려고, 혹은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다. 소관 부처나 참여하는 위원이나, 위원회를 통해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겠다는 기대와 의욕은 거의 없다. 관행적으로 회의하고 부처 방침과 크게 엇나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발언하고 결론 낼 뿐이다. 당시 영국에서 사회보험 개선 위원회를 꾸렸을 때도 딱 그 정도 역할을 예상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위원회는 역사에 길이 새겨진 대박을 터뜨렸을까?
천·지·인 갖춘 위원회 기회 창 열려
무릇 큰일이 성사되려면 당사자들의 노력과 함께 적절한 타이밍과 유리한 여건이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 법이다. 이를 두고 그 옛날 맹자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정책학에서는 문제 발생(시점), 여론·정치권의 관심(여건), 적절한 대안 설계(정책 담당자의 능력과 열의)가 함께할 때, 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열린다고 설명한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참으로 그랬다. 천·지·인 삼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에 기회의 창이 열렸다.
위원장에 임명된 베버리지는 처음에 낙담했다. 자신은 훨씬 중요한 일을 맡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고작 기존 사회보험 제도 손질이라는 한직에 발령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회개혁 의지가 충만했던 베버리지는 생각을 바꿔서 위원회에 올인했다. 위원장의 열정에 의기투합한 위원회는 제대로 사고를 쳐서 복지국가 청사진을 완성했다. 타이밍도 기막혔다. 전쟁의 포화 속에 좌절한 국민에게 베버리지 보고서는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다. 국민은 전후의 희망찬 복지국가를 그리며 열광했다. 여건도 유리했다. 종전을 앞두고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복지 친화적인 노동당은 전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베버리지 보고서의 제안을 충실하게 반영했다.
80년 전의 외국 얘기를 꺼낸 까닭은, 베버리지 위원회처럼 큰 업적을 내길 바라는 우리 위원회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규제합리화위원회이다. 지난 2월에 출범한 규제합리화위원회의 전신은 규제개혁위원회이다. 규제개혁에는 부적절한 규제의 완화·철폐뿐만 아니라 필요한 규제의 보완과 강화도 포함된다. 그런데 개혁이라고 하면 거의 기존 규제의 완화·철폐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개혁 대신 합리화로 명칭을 바꾸고, 업무 범위가 확장된 만큼 조직도 확충한 것이다. 적절한 명칭 변경이고 필요한 조직개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에 규제 개혁 혹은 합리화가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이해관계집단의 저항과 정치인·관료의 열의 부족(?)으로 인해 부적절한 규제가 그대로이고 필요한 규제를 못 만들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던 차에 규제개혁(합리화)을 위한 천·지·인 삼합이 갖춰지고 ‘기회의 창’이 열린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AI를 필두로 한 기술혁명의 거센 열풍으로 인해 경제·사회구조 재편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여건도 참으로 유리하다. 무엇보다 이재명 대통령이 규제혁신에 진심이다. 기존에 국무총리가 위원장이던 규제개혁위원회를 대통령 본인이 위원장인 규제합리화위원회로 업그레이드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또한 여당이 다수당이라 법안 통과도 수월하다. 이처럼 천시와 지리가 갖춰진 마당에, 정치인 박용진이 부위원장에 임명됨으로써 인화까지 채워졌다.
대한민국 규제혁신 청사진 기대
박용진 부위원장은 2018년 국정감사 때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로 일약 스타 정치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의 해결에 진력해 ‘유치원 3법’을 만든 주인공이다. 유치원 3법 제정 외에도 진보의 가치를 담되 실용을 겸비한 다양한 정치 활동을 해왔다. 나는 박 부위원장이 우리 정치 풍토에서 보기 드물게(!) 소명 의식과 열정을 지닌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를 규제 합리화 업무를 지휘할 부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화룡점정이라고 평가한다.
규제개혁위원회가 만들어진 지 2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위원회 출범 직후 김대중 대통령 지시에 따라 각 부처 규제 건수를 절반으로 감축한 것 외에는 주목할 만한 업적은 찾기 어렵다. 초창기를 제외하면 정부의 여느 위원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역할만 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를 것이다.
박 부위원장(과 두 명의 학자·기업가 출신 민간 부위원장)이 이끄는 규제합리화위원회라면 절대로 기존처럼 그저 위원회에 상정된 안건만 심의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우리 경제와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 완화와 필요한 규제 강화에 나설 것이다. 물론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 정도에 만족하지 말고 규제샌드박스 확충과 원칙 중심 규제 도입 등 규제체계 틀을 바꾸는 데도 매진하면 좋겠다. 베버리지 위원장이 위원회에 부여된 임무를 뛰어넘어 복지국가 그랜드 플랜을 작성했듯, 과감하게 대한민국 규제혁신 청사진을 설계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 노동당이 이를 받아들여 복지국가를 구축했듯, 여당이 이를 수용하여 대한민국 규제혁신을 이뤄내길 바란다. 천·지·인 삼합을 갖춤으로써 기회의 창이 활짝 열렸다. 규제합리화위원회 파이팅!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