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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뺑소니

입력 2026.03.29 19:55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초기에 제기되던 가장 큰 의문은 이 전쟁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언론에 설명한 전쟁 명분은 날마다 바뀌었는데, 당장 떠오르는 것만 적어봐도 이란 정권 교체, 이스라엘 안보, 미국 안보, 이란 핵·미사일 프로그램 파괴 등 너댓 가지가 된다. 왜 하는지도 모른 채 시작한 이 전쟁은 이제 하나의 명확한 목표를 갖게 됐다. 호르무즈 해협을 재개방하는 것이다. 호르무즈는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애당초 봉쇄되지 않았을 곳이다. 전쟁사에 역대 가장 한심한 전쟁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다.

트럼프에게 반면교사가 될 선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미국을 두 번의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전쟁광’이라는 꼬리표를 얻었다. 부시 행정부가 전후 이라크에서 허우적거리던 2007년 “부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일 것”이라고 비웃었던 사람이 트럼프다.

그러나 적어도 부시 행정부는 동맹국을 상대로 개전의 정당성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책임도 외면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엔 중동을 통제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트럼프는 이란의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미사일부터 퍼부었다. “이란 차기 지도자로 염두에 뒀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었다”는 트럼프의 말은 그의 행정부가 치밀한 시나리오나 출구 전략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트럼프의 가벼움은 작전명에서도 드러난다. 부시의 아프간전, 이라크전 작전명은 각각 ‘항구적인 자유’ ‘이라크 자유’였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해 6월 이란 공습 때 ‘한밤의 망치’, 이번 전쟁에선 ‘장대한 분노’라는 작전명을 내걸었다.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트럼프의 전쟁에 대해 “자유주의 질서를 중동에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풀이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것은 패권이 아니라 뺑소니”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뺑소니가 뒤탈 없는 완전 범죄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전쟁은 ‘상호관세’ 정책처럼 한쪽이 그만두길 원한다고 해서 뜻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파괴된 미사일 발사대 개수로만 승패를 평가할 수 없는, 이 전쟁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글로벌 원유 공급망이 붕괴하든 말든 지금 이란으로선 호르무즈를 개방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예멘 친이란 후티 반군이 참전하면서 홍해도 봉쇄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호르무즈를 열지 않으면 이란 발전소를 초토화하겠다”던 트럼프가 돌연 이란과 협상 중이라고 발표한 것은 그가 이 전쟁에서 빠져나갈 퇴로가 협상을 통한 종전밖에 없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습으로는 호르무즈를 열 수 없고, 지상군 투입은 전쟁 장기화와 미군 사상자 증가 등 정치적 부담이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란의 핵 위협을 전쟁 명분으로 들먹거리고선 고농축 우라늄 440㎏의 소재도 확인하지 못한 채 승전을 선언하고 철수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지다. 고작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자고 전쟁을 벌인 꼴이 된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자충수 외에는 둘 만한 수가 없는 이번 전쟁에 대해 “트럼프의 정치적 앞길을 가로막기 위해 (그 자신이) 정밀하게 설계한 위기”라고 꼬집었다.

이번 전쟁으로 이란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지도부가 사망했고 미사일 프로그램과 방공망이 무력화됐다. 그러나 정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는 없다. 2년 연속 미국과 핵 협상 도중 공습당하면서 온건파의 입지는 축소되고 강경파가 힘을 얻었을 공산이 크다.

이란은 그간 이론가들의 전쟁게임 시나리오 속에나 존재하던 호르무즈 봉쇄 전략을 실현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지렛대를 확인했다. 호르무즈를 막는 데는 대단한 군사력이 필요하지 않다. ‘기뢰를 부설하겠다’는 위협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세계 경제를 볼모로 잡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4월 말까지 호르무즈가 열리지 않으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 선까지 오를 것으로 본다. 오늘 전쟁이 끝나도 석유 생산량 복구에 4~6주, 석유 시장 안정에 4~8주가 걸릴 수 있다. 고유가가 지속되는 동안 트럼프의 11월 중간선거 승리 확률은 줄어들 것이고, 이란 정권은 국제적으로 더 강화된 지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이란에 ‘장대한 분노’나 표현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겠지만, 대책 없이 화를 내고 난 이후엔 감당해야 할 일들이 발생하는 법이다.

최희진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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