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맡아 ‘고문 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 전 경감이 25일 숨졌다. 향년 88세. 이 전 경감은 2023년 초 부인을 잃고 서울에서 홀로 지내왔으며 최근 건강이 악화해 요양병원에 입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2012년 자서전 출판기념회 당시 이 전 경감. 연합뉴스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1986년 2월 체포된 김양기씨(76)는 그를 지하실에 묶어두고 발가벗겨 고문하던 육군본부 505보안대 지휘관들의 이름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지휘관들은 공을 인정받아 상훈을 받았다. 김씨의 끈질긴 요구로 2018년 지휘관 3명의 보국훈장과 대통령 표창이 취소됐다. 그는 30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자신을 고문한 일을 공적 삼아 떵떵거리며 사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속이 쓰렸다고 말했다. 김씨는 “1994년 이들을 고소했지만 담당 검사가 ‘내가 무슨 힘이 있어요. 법을 고치세요’라고 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사망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의 상훈 대부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정부가 뒤늦게 고문 수사관 등의 상훈을 전수조사해 취소하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김씨처럼 억울한 목소리는 어제오늘 나온 게 아니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상훈 박탈을 주장하던 시민사회의 움직임은 예전부터 계속돼 왔다.
2019년 12월 홍익표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현 청와대 정무수석)이 ‘역사정의실천연대 과거사특위’에 의뢰해 작성한 ‘과거청산 입법 현황과 과제’ 문건에는 국가폭력 가해자 상훈 취소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이를 입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특위는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 등 422개 단체가 모인 단체로 친일·독재 잔재 청산과 역사정의 실현을 위해 상훈 취소 등을 추진해왔다.
특위는 이 문건에서 당시 행정안전부가 2018·2019년 간첩조작사건 및 광주민주화운동 등 관련자 61명의 서훈 취소 결정을 한 것에 대해 “소극적·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인권침해 사건 238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했고, 79개 사건에 대해 재심 권고를 했는데, 서훈 취소는 10여건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어 “행안부가 서훈 취소 대상을 재심에 의한 무죄 사건으로 한정해 서훈 취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거짓 공적을 이유로 상훈 취소가 가능하다. 진화위 결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상훈 취소를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가해자들에 대한 상훈 취소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과거 국가의 불법 폭력에 희생된 분들에게 국가가 명예회복은커녕 오히려 2차 가해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당시 문건을 작성한 안경호 전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상훈 취소가 있었지만, 수많은 고문 수사관에 훈장을 줬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며 “고문 가해자들에 대해 현행법으로 단죄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정부가 의지를 갖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소한 진화위의 진실규명 결정이 나온 사건 관련 가해자의 상훈을 취소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씨도 “상훈 취소는 하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간첩으로 몰았던 이들은 잘 살아가고, 평생 불이익을 받은 피해자들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고생하며 살고 있다”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잡아 고문하고 이용한 사람들의 훈장과 혜택을 전부 취소·반납시켜야 한다”고 했다.
경찰은 첫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경찰청은 1945년 창설 이래 경찰관들에게 수여된 정부 포상과 대통령·국무총리 표창 7만여개의 공적 사유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 현행 상훈법은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 훈·포장을 취소할 수 있게 돼 있다. 2017년부터는 정부표창규정이 개정되면서 대통령·국무총리·기관장 표창도 박탈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은 조만간 서훈·표창 취소 대상자를 국무총리실에 보고할 계획이다. 이후 심의위원회를 열고 당사자 소명을 들은 뒤 행정안전부에 취소를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