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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민심은 어디에 있는가

입력 2026.03.30 20:23

[오항녕의 독사관견 讀史管見]‘왕과 사는 남자’, 민심은 어디에 있는가

242년 만에 노산군에서 단종의 복귀는
민심이 단종의 억울함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세조 딸과 김종서 아들의 혼인설이 거짓임을 알고도
그런 얘기가 만들어진 건 사회와 나라의 룰이
부당하게 무너진 데 대한 불안과 억울함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왕사남’에 어떤 민심을 반영하고 싶은 걸까
은닉 대본에 숨은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비극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첫째 기억. <단종실록>을 읽다가 불현듯 차를 몰고 영월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늦은 여름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제천 가는 국도를 거쳐 주촌 산길로 빠졌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엔 강을 건너주는 사공이 있었고, 그의 말로는 여기가 남강이라고 했다. 남강은 유턴을 하며 흐르고 있었고 뒤는 절벽, 그리고 또 산이었다.

나는 영월 화력발전소에 근무하던 친구 집에 묵었다. 친구는 이런 산골짜기까지 조사를 해서 화력발전소를 지었던 일제 식민지 지배의 집요함이 섬뜩하다고 말했다. 나는 청령포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런 험지가 있는 걸 알고 단종의 유배지로 정했을까?

순간 ‘세종실록지리지’가 떠올랐다. <세종실록>은 일기처럼 연월일로만 된 다른 실록과 달리, 음악이나 의례 같은 분야사를 부록처럼 수록하고 있다. ‘지리지(地理志)’도 그중 하나이다. 거기에 강원도 원주목 영월군의 현황이 적혀 있다. 땅이 척박해 벼농사가 안되고 기장, 피, 조, 콩 등 잡곡을 경작한다. 느타리, 송이버섯, 꿀, 노루가죽 등이 특산물이란 정보도 실려 있다. 영화에서 유해진 배우가 연기한 엄흥도의 엄(嚴)씨도 영월 토성(土姓)이라고 나와 있다. 단종과 관련해 엄흥도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충의공 엄선생 실기>에 남아 있다(율곡국학진흥원, 2021 번역).

지리지는 전국의 지형, 물산이 담긴 종합정보서로, 세종 때 조사한 결과이다. 이 지리지를 참고해 영월이 단종의 유배지로 정해졌을 것이다. 세종은 지리지를 편찬하면서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고, 손자를 여기 영월로 유배시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행위는 그 목적과 다른 결과를 낳는 일이 적지 않다.

실록 표지는 <단종대왕실록>으로 되어 있지만, 본문 표제에는 ‘노산군일기’로 되어 있다.

실록 표지는 <단종대왕실록>으로 되어 있지만, 본문 표제에는 ‘노산군일기’로 되어 있다.

군(君), 사릉(思陵)

조선 역사에서 폐위된 임금이 셋 있었다. 노산군(魯山君)·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이 그들이다. 흔히 ‘군’을 왕자를 지칭하는 말로 오해하는데, 아니다. 임금답지 못한데 참람하게 왕위에 있다가 폐위된 경우 ‘모군(某君)’이라는 식으로 기록한다는,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 범례에 따른 명칭이다.

수양대군은 1453년 정난(靖難)으로 미화한 ‘계유사화’를 통해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거나 쫓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이어 2년 뒤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 이윽고 1457년(세조 2) 6월21일, 성삼문 등 사육신 및 단종의 장인 송현수가 역적모의를 꾸몄고 단종이 거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단종은 상왕(上王)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궁에서 쫓겨나 영월로 떠났다. 단종의 왕비 송씨는 남편과 헤어져 지금의 남양주로 쫓겨났다. 세조 이후 성종, 연산군, 중종대까지 살다가 82세에 기구한 인생을 마쳤다. 그의 무덤은 사릉(思陵), ‘그리워하다 죽은 사람의 무덤’이다. 지금 경춘선 사릉역이 있다.

여기서 둘째 기억. 내가 상왕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저 단종이라고만 불렀지 노산군이 정확히 언제 단종이 되었는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조사를 시작하게 됐고, 2010년 나온 <조선의힘>(역사비평사)에 상세히 밝혀놓았다.

242년의 기억

단종 복위 시점은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웠다. 첫째, 조선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이루어진 시기가 다름 아닌 ‘망해가고, 경직된, 당쟁으로 얼룩진’ 시대라고 배웠던 1698년(숙종 24) 전후였기 때문이다. 4년 전에는 장희빈을 내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갑술환국(1694, 숙종 20)이 있었다. 계산해보니 노산군으로 쫓겨난 뒤 242년 만에 단종으로 복권된 것이었다. 이것이 놀라웠던 두 번째 이유였다.

생각해보자. 세조 이후의 왕, 예를 들어 예종, 성종부터 쭉 세조의 후손이다. 문종이나 단종의 후손이 아니다. 따라서 세조에게 반역했다는 죄명을 얻은 사육신과 단종에 대한 복위 논의를 꺼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 사람들은 오랜 시간 잊지 않고 결국 바로잡았다.

그래도 사육신의 무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노산군 제사는 지내야 하지 않느냐, 사육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자, 이제 세월도 흘렀지 않느냐, 생각해보면 충절이 있지 않으냐 등등의 이유를 들어 복권, 복위 논의를 이어왔다. 결국 세조의 본의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내가 보기엔 당치도 않은 이유까지 만들면서 결국 숙종이 사육신과 단종의 복권, 복위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아들과 딸의 사랑

이러한 조정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민심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민심이 단종의 억울함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많다. 예를 들어, 명종 때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있을 때, 고을에는 요사한 일들이 발생해 사람이 죽곤 했다고 한다. 특히 관청의 관리들이 이름 모를 병으로 죽어갔다. 사람들은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죽은 노산군의 원혼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했다. 이런 민원에 따라 노산군 묘에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고 나서야 이상한 일들이 그쳤다고 한다.

언젠가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에서 김종서(1384~1453)의 아들과 세조(1417~1468)의 딸이 사랑에 빠지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세종의 충신이었던 김종서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셋째 승유(1420~1495) 빼고는 계유사화 전후로 모두 몰살당했다. 손자들도 몰살당했다. 한편, 세조에게 의숙공주(1440~1478)가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는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와 혼인했다. 그러니까 나이나 상황으로 보아 드라마 같은 일이 생길 리 없었다.

금계필담의 일화

서유영이 모은 야담집 <금계필담>(1873)에는 세조의 맏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혼인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턱도 없는 얘기이다.

세조 딸과 김종서 손자의 혼인설은 거의 거짓(허구가 아니라!)이다. 역사학자는 없던 일을 있다고 하면서 논의를 시작할 수가 없다. 이 얘기는 사실이 아니므로 사료(史料)에서 기각된다. 하지만 이 얘기를 사람들이 야담으로 전해왔다는 건 사실이다. 즉 혼인설을 지어내고 얘기하는 민심은 기각되지 않는다.

나는 당시 이 얘기를 하던 사람들도 이것이 거짓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고 추정한다. 그럼 왜 그랬을까? 왜 이런 얘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졌을까? 사회와 나라의 룰이 부당하게 깨지고 무너진 데 대한 불안, 공분, 나아가 억울함에 대한 인민의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었다. 이 지점에서 없는 얘기라도 만들어 피해가려던 게 아니었을까? 환각제를 맞아서라도 집단적 상처를 누그러뜨리려는 안간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역사에서 사람들의 정치의식은 이렇게 숨겨진 은닉 대본(hidden script)으로 보존된다.

영화는 영화, 역사는 역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을 넘어 역대 관객 동원 1위의 신기록을 세울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선지 주변에서 내게 자꾸 묻는다. 그 영화 사실이냐고. 이런 질문을 예상했는지, 영화는 처음부터 사실에 바탕을 두되 상상력을 더했다고 말했다. 더 이상 어떻게 양해를 구하겠는가.

좀 아는 친구들은 무슨 도승지가 한양에 있다가 금방 영월에 있을 수가 있냐,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도승지 혼자 유배도 보내고 역모도 진압하느냐고 비판한다. 맞다. 유지태 배우가 훌륭히 연기한 한명회가 당시 도승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이건 역사학도의 생각이다. 감독 입장에서는 유지태 배우만으로도 영화의 완결성을 갖출 수 있다면 배우 섭외나 제작비도 당연히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사극’이니까 묻고 싶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 어떤 민심을 반영하고 싶은 걸까? 지난 영화들과 달리 주인공이 되어 새롭게 등장한 단종과 엄흥도를 보면서 21세기 시민들이 만들어내고 싶은 야담은 무엇일까? 시민들이 은닉 대본에 숨기고 싶은 정치의식은 무엇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항녕 전주대 명예교수

오항녕 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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