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역도 선수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본 적이 있다. 탄마가루 대신 분필가루 휘날리며 교수님으로 변신한 장미란 선수. 용상에서 바벨을 어깨까지 올린 뒤 허리 반동으로 번쩍 들고 포효하는 장면은 길이 기억에 남는다. 그가 덜어낸 무게만큼 세상은 가벼워졌던가. 지난날의 저 무거움을 누구보다 잘 다룬 고수답게 풍선처럼 풀어놓는 이야기. 말은 얼마나 가벼운가. 또한 말은 얼마나 무거운가. 그때의 고독을 이제는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얼굴에 해맑은 표정이 철철 흘러넘쳤다.
모래판의 애환을 다룬 ‘나는 씨름 선수다’를 최근에 보았다. 천하의 장사들이 자웅을 겨루던 시합은 인기가 많이 시들해졌다. 그러나 이 한판 승부에 인생을 건 이들이 오늘도 자신과의 모진 싸움을 벌이고 있다. 씨름은 거칠다는 선입견에 여자들은 꺼리는 종목이었지만 근래 많은 선수가 천하장사의 꿈을 키운다고 한다. “남자들은 꺾이는 맛이 있는데 여자들은 (…) 걸려도 이게 부드럽고 유연하게 살아나면서 다시 되치기가 들어가고. ‘걸렸습니다’ 했는데 ‘어, 살아났습니다’ 이런 반전이…”(이태현 전 천하장사)라는 인터뷰를 보는데 이중허리란 말이 떠올랐다.
이중허리란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약한 바둑기사 린하이펑이 불리한 국면에서도 끝내 뒤집기에 능한 기풍에 붙인 말이다. 역도, 씨름, 바둑. 어느 것 하나 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사람의 길은 다 달라서 자신의 소질을 찾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나는 동네바둑만 조금 만지작거렸을 뿐 둘은 구경꾼처럼 거저 눈으로 보기만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또한 운동의 축소판이다. 그 동작을 담은 말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보다’가 있다. 이는 시도, 경험, 추측도 포괄하는 압도적인 감각이다. 세상만사의 반(半)은 이 말의 우산 안에 언제나 풍경으로 드러난다. 눈으로 앞을 본다는 것. 이는 대상에서 반사되는 빛을 수동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기만 할 뿐이라고 얼핏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과연 봄이 시선을 그물처럼 던져 대상의 표면을 끌어오는 것에 불과할까. 그럴 리가, 그 빛을 되치기하여 사물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건 나의 몫이자 기술. 그야말로 내 눈빛의 이중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