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는 쇠퇴하던 패권국 영국이 몰락한 계기였다. 영국은 이집트의 운하 국유화 조치에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해 이집트를 공격했다. 1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집트가 운하에 배들을 침몰시켜 석유 수송 길목을 차단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유가가 폭등하고 세계 경제에 비상이 걸렸다. 떠오르던 강대국 미국은 영국을 비판했다. 영국이 유엔 제재를 받고 굴욕적으로 물러날 때쯤 영국의 패권은 증발해버렸다.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매코이는 블로그 톰디스패치에 쓴 ‘호르무즈 해협에서 제국의 몰락’이라는 글에서 70년 만의 기시감을 언급했다. 이번엔 미국의 패권국 지위가 추락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5주 가까이 이란 핵능력 제거, 체제 교체 등 애초 말했던 전쟁 목표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반면 이란은 미국의 안보우산을 뚫고 중동의 미 동맹국들을 공격했고, 석유 수송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함으로써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결국 트럼프는 불필요한 전쟁 개시로 중동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의 동맹국들에 고통을 안겨줬을 뿐이다.
여전히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전쟁 이후 미국의 신뢰도가 더 떨어지리라는 점이다. 단지 심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달러 패권 약화라는 물질적 실체가 수반되고 있다.
달러가 기축통화인 이유는 세계 교역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석유가 달러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1974년 밀약으로 확립된 이 관행은, 산유국이 보유한 잉여 달러를 미국 국채 등에 투자하고 미국은 이들 국가에 안보를 제공하는 식으로 유지돼왔다. 페트로달러라고 불리는 이 시스템은 미국이 많은 돈을 찍어내 막대한 군비 지출, 기술 혁신을 하면서도 자국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비결이자, 아무나 누리지 못한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석유의 안정적 공급과 미국의 안보 제공이라는 두 전제에 구멍이 뚫린 만큼 이 시스템이 예전처럼 작동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시점에 우리는 미국이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공해왔다는 ‘공공재’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전까지, 미국은 ‘민주주의와 평화, 번영을 위한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위해 동맹국 안보와 항행의 자유, 국제 통화 안정 등에 앞장서는 것을 ‘미국의 사명’으로 표방했다.
트럼프는 아름답게 포장된 사명의 가면을 벗겨버렸다. 미국이 공공재로 포장한 것의 실체는 화석연료로 무한증식을 추구하는 경제성장 체제를 세계화한 것이다. 그 결과 미국 등 서방의 엘리트들은 천문학적 부와 권력을 쌓았고, 약소국에 대한 미국의 제국적 개입과 전 세계적 금융위기가 반복됐으며, 무엇보다 기후위기가 가속화했다.
미국의 엘리트들이 기후위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석유업계의 로비도 있겠지만, 전 세계가 온실가스 감축을 제대로 하는 순간 페트로달러의 근간이 무너지기 때문인지 모른다. 미국인들은 1992년 리우 환경정상회의 직후 조지 H W 부시가 ‘미국적 삶의 방식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한 말을 경구처럼 되풀이한다. 그것은 미국적 의미의 풍요, 즉 더 많이 만들어 더 많이 쓰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는 미국 역사를 통틀어 관찰되는 특징이다. 미국 역사학자 모리스 버먼은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책에서 영국 이주민들이 미국 땅에 정착한 이후 지난 400년은 사리사욕과 부의 추구가 물욕의 자제와 공공선 추구를 압도한 역사였다고 했다. 지금 미국의 모습은 이익을 추구하느라 늘 불안해하고 쫓기듯 살면서 애초에 가졌던 도덕적 신념, 공화국의 이상은 텅 비어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그러한 공허, 허무의 노골적 화신일 뿐, 미국 역사에서 그렇게 예외적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비극은 오랜 미국 패권하에서 세계가 미국을 닮아왔다는 점이다. 패권이라는 말이 정확히 그런 뜻을 갖는다. 170명이 넘는 이란 초등학생들이 대량학살된 사건보다 AI·반도체·방산 주가에 더 관심을 갖는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미국적 세계의 포로가 됐는지 잘 보여준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탈(脫)미국을 해야 한다. 그것은 국제정치적 의미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일상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가능하다는 전제 자체를 바꾸는 작업과 병행해야 한다.
손제민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