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스트 피터 굿맨이 쓴 <공급망 붕괴의 시대(How the World Ran Out of Everything)>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전달할 장난감을 미국으로 들여오려는 한 수입업자의 분투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부 연안 닝보에서 생산된 장난감은 컨테이너선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 롱비치 항구에 도착하고, 다시 트럭을 통해 미국 동부로 향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산 차질과 물류 대란 같은 변수가 끊임없이 발생하며, 수입업자의 계획은 번번이 흔들린다. 코로나 직후인 2021년에 벌어진 일이지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세계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기록은 한 개인의 고군분투를 넘어, 효율성만을 추구해온 현대 공급망의 취약성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효율’은 1990년대 이후 세계화 시대의 지배적 가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이념 논쟁은 흘러간 유행가처럼 시시해졌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생산기지가 세계 자본주의 분업체제에 편입되면서 자본은 국경을 넘어 가장 싸게 생산할 수 있는 곳에 공장을 지었다. 또한 컨테이너선이라는 저렴한 운송수단의 확산은 원거리 생산에 따른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JIT(Just-In-Time, 적기 생산 시스템)’다. 1970년대 일본 도요타 자동차가 확립한 이 방식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운송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재고를 쌓아두는 것을 불필요한 낭비이자 비용으로 간주하고, 부품이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조립 라인에 투입되도록 설계한 시스템이다.
세계화의 전성기 동안 JIT는 기업 경영의 금과옥조로 통했다. 저렴한 노동력과 원활한 물류망을 전제로 한 이 시스템 덕분에 기업들은 창고 유지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자본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 역시 전 세계 어디서든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적시에 공급받는 혜택을 누렸다.
‘저비용·고효율’ 공급망 시대 균열
JIT로 상징됐던 세계화는 이제 세 가지 거대한 암초를 만나 좌초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세계화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다. 국가 간 분업화로 총량적인 부는 늘었을지언정, 그 과실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다. 세계화의 거센 파도 속에 일자리를 잃고 소외된 이들은 영국에서는 브렉시트를 선택하고, 미국에서는 트럼프를 지지하며 ‘자국 우선주의’라는 보호막 뒤로 숨어버렸다. 효율성보다 ‘우리 편의 생존’이 우선시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둘째는 코로나19가 남긴 뼈아픈 성찰이다. 팬데믹은 전 세계로 과도하게 흩어진 공급망이 얼마나 취약한지 증명했다. 마스크 한 장조차 자급자족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던 경험은, 비용이 더 들더라도 재고를 넉넉히 쌓아두고 생산기지를 인접국이나 자국으로 옮기게 하는 발상의 전환을 끌어냈다.
마지막으로 미·중 갈등을 필두로 한 지정학적 균열이다. 이제 경제는 더 이상 정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진영 간의 대립은 공급망을 ‘무기화’했고, 효율적인 생산·물류 경로보다 ‘안전한 가치동맹’이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역시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원유 수송로의 불안은 물론,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헬륨 수급 차질과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부족에 따른 생산 타격 우려는 경제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효율성의 상징이었던 JIT는 역설적이게도 ‘여유(Slack)’가 전혀 없다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재난이나 봉쇄로 공급망의 사슬 중 단 한 곳이라도 어긋나면 전체 시스템이 마비되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비용 절감을 위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었던 JIT의 마법은 풀렸다. 이제 세상은 비용을 더 지불하더라도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JIC(Just-In-Case, 만약을 대비하여)’의 시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비싸도 끊이지 않는 공급이 중요
이미 기업들은 재고를 비축하고 있다. 2025년 3분기 말 한국 상장 제조업체들의 재고자산 규모는 434조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재고 증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업은 판매 호조가 예상되는 제품에 대해서는 재고를 늘려 고객들의 주문에 즉각 대응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적정 재고 규모는 매출과 함께 살펴야 한다. 매출이 늘어나는 국면에서 나타나는 재고 증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매출보다 재고가 빠르게 늘어나는 건 의미를 달리한다. 수요에 대한 기대가 현실을 앞서가고 있거나, 공급망 불안에 대한 과도한 대비가 비용 부담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제조업체들의 재고 증가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 매출을 재고자산으로 나눈 재고자산 회전율이 기조적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장 제조업체들의 재고자산 회전율은 2004~2010년 1300~1400%대에서 움직이다가 2023년 이후로는 700%대를 보이고 있다. 데이터가 집계되기 시작한 199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재고자산 회전율의 기록적인 하락은 우리가 더 이상 과거의 ‘저비용·고효율’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리는 경고다. 이제 경제의 패러다임은 ‘최저가 경쟁’에서 ‘비용을 지불한 안전’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재고 유지비와 생산기지 이전 비용, 그리고 가치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비용은 결국 제품 가격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가장 싸게 만들고 가장 빠르게 배송하던 질서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 공급망의 안정성과 안보를 확보하려면 중복 투자와 여유 재고를 감수해야 하고, 이는 곧 비용 상승으로 이어진다. 기업은 더 많은 자본을 묶어두게 되고, 소비자는 그 부담을 가격으로 떠안는다. JIT가 약속했던 ‘싸고 빠른 세상’은 점점 멀어지고, 이제는 ‘비싸더라도 끊기지 않는 공급’을 선택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효율의 극대화가 아니라 안정성의 확보가 경쟁력이 되는 순간, 우리는 이전보다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