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대하는 새로운 문법…감추거나, 보이거나 ‘북 꾸미기’
“무엇을 읽고 있는지 들키고 싶지 않아서요.”
배우 차주영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밝힌 ‘북커버’ 사용 이유다. 짧은 문장이지만, 지금의 독서 문화를 정확히 겨냥한다. ‘텍스트힙’ 열풍 속에서 독서는 다시 유행의 궤도에 올라섰다. 다만 방식은 달라졌다. 책은 더 이상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손에 드는 순간 타인의 시선에 포착되고,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를 드러내는 기호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독서는 묘한 긴장을 품는다.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숨기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작동한다. 취향을 보여주고 싶으면서도, 특정 선택은 감추고 싶어진다. 이 상반된 욕망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등장한 장치가 ‘북커버’다.
독서의 방식이 바뀌다
이른바 ‘북꾸(책 꾸미기)’는 지난 몇년 사이 독서를 다루는 방식을 단계적으로 바꿔왔다. 시작은 단순했다. 스티커를 붙이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를 남기는 식이었다. 텍스트 위에 자신의 흔적을 덧입히는 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흐름은 곧 방향을 틀었다. 기록을 남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이는 방식’ 자체를 설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이를 빠르게 증폭시켰다.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책과 커피, 침대 위에 펼쳐진 페이지, 정성스럽게 필사된 노트까지 독서는 점점 장면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텍스트힙’ 열풍 속에서 이른바 ‘북꾸’(책 꾸미기) 문화가 진화하고 있다. 책 취향을 숨기는 북커버부터 독서 경험을 후각으로 옮겨가는 북퍼퓸까지 감각 중심 소비로 확장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사진제공 @gong_y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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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읽느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읽고, 어떻게 남기고, 어떻게 드러내느냐가 함께 고려되기 시작했다. 독서는 읽는 것을 넘어 일종의 ‘연출된 경험’으로 확장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겼다. 바로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다.
북커버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답이었다. 감추고 싶을 때는 가리고, 드러내고 싶을 때는 바꿔 끼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는 유지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만 조정하는 방식이다. 변화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북커버 매출은 전년 대비 187.6% 증가했고, 검색량은 1년 사이 28배 급증했다. 독서의 ‘겉면’을 다루는 상품이 콘텐츠 못지않은 주목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북커버를 애용하는 대학생 이서율씨는 “자기계발서나 특정 장르의 책을 읽을 때면 괜히 시선이 신경 쓰인다”며 “북커버를 씌우면 그 시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책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핸드메이드 북커버, 북퍼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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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북커버가 정반대의 방식으로도 활용된다는 데 있다. 일부 독자는 북커버 자체를 하나의 메시지로 사용한다. 브랜드 로고가 크게 들어간 패브릭 커버, 그래픽 디자인이 강조된 커버, 문장이 적힌 커버 등 책의 원래 표지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책은 완결된 상품이 아니라, 독자의 선택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가변적인 인터페이스’가 됐다.
흐름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기성 제품을 고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하는 단계로 확장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는 십자수로 표지를 덮은 책, 패브릭을 덧댄 커버, 손 그림으로 다시 디자인한 표지들이 꾸준히 올라온다. 이 과정에서 책은 읽고 나면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물건이 된다. 독립서점 ‘오평’의 오수민 대표는 십자수로 꾸민 세계문학 전집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손으로 만드는 과정 자체가 책과의 관계를 바꾼다”며 “십자수를 놓는 동안 책을 반복해서 떠올리게 되고, 그 시간이 곧 독서의 연장이 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독서를 감각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퍼퓸’이다. 책의 분위기와 장면을 향으로 번역하는 이 방식은 독서 경험을 후각까지 끌어들인다. 특정 문장을 떠올리며 향을 조합하고, 그 기억을 냄새에 묶어두는 식이다. 북퍼퓸 제작 클래스를 운영하는 윈썸아트랩 전현욱 대표는 “책을 읽던 순간의 공기와 감정을 향으로 고정하면 시간이 지나도 그 장면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 퍼지는 향은 독서의 속도와 밀도를 바꾼다. 읽는 행위가 공간을 경험하는 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책 한 권’이 아닌 ‘경험 패키지’
개인의 취향 드러나는 책
북커버 씌워 시선 막거나
오히려 나만의 방식으로
책 꾸며 ‘나’를 적극 표현
읽는 행위에서 ‘경험’으로
독서의 감각적 확장 시도
변화는 출판산업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책갈피, 스티커, DIY 커버를 함께 구성한 패키지 상품이 늘고, 한정판 커버와 굿즈를 결합한 기획이 확대되고 있다. 읽는 행위 전후의 경험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패키지로 재구성되고 있다. 국내 한 출판사 MD로 근무 중인 이현주씨는 “요즘 독자는 책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지까지 함께 고려한다”며 “같은 책이라도 어떤 커버로 들고 다니는지,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소비가 된다”고 말했다.
물론 우려도 제기된다. 지나친 꾸미기가 독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내용보다 형식이 앞서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흐름을 단순한 ‘겉치레’로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독서를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책 인플루언서 이지혜씨는 “정성 들여 꾸민 책은 자연스럽게 손이 더 간다”며 “보여주고 싶어서라도 책을 들고 나가게 되는데, 그 순간 이미 독서가 시작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외형을 가꾸는 행위가 읽기를 유도하는 동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독서는 어떻게 경험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지,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지를 스스로 설계하는 과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황혜선 성균관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현대 소비는 기능적 효용을 넘어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확장되고 있다”며 “책을 꾸미고 감각을 덧입히는 행위는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흐름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