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꽃길…첨성대·불국사·선덕여왕길·황룡사지의 봄
천년의 시간 위에 봄이 내려앉은 경주는, 꽃과 유적이 어우러진 특별한 풍경을 완성한다. 걷는 순간마다 다른 색으로 피어나는 그곳의 봄은, 짧기에 더욱 깊이 남는다. 사진은 첨성대 일대 야생화 단지.
봄. 경주가 달라지는 계절. 고분과 석탑, 역사가 깃든 땅에 꽃이 피어나면 천년고도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역사 교과서 속 도시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꽃의 도시로. 튤립과 겹벚꽃, 유채꽃이 번갈아 피어나는 계절, 이 도시에선 어디를 향하든 봄과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계속 걷는다. 우리의 봄은 길지 않으니까.
화려하게 펼쳐진 봄, 첨성대 꽃밭
1400년 전 하늘을 관측하던 돌탑 아래엔 별천지 대신 꽃천지가 펼쳐진다. 첨성대는 7세기 선덕여왕 때 세워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원통형 탑은 높이가 9m 남짓. 높지는 않지만 광활한 데 홀로 서 있어 어디에서나 눈에 들어온다.
첨성대 일대는 봄이 되면 한껏 화려해진다. 경주시가 조성한 야생화 단지 덕분이다. 첨성대의 4월을 채우는 주인공은 알록달록한 튤립이다. 빨강, 노랑, 분홍의 왕관 20만송이가 꽃의 바다를 이룬다. 아니, 꽃의 우주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첨성대니까, 별 대신 꽃을 관찰하고 꽃 사이를 유영하는 거다.
분황사와 황룡사지 사이 약 1만평 들판에 유채꽃과 청보리가 함께하고 있어 바람에 따라 색이 교차한다. 노란 물결이 역사 유적과 어우러져 어디서도 보기 힘든 경주만의 봄 풍경을 이룬다.
튤립 너머, 계림 방향으로는 샛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진다. 이 별에서 저 별로 이동하듯 작은 다리를 건너면 눈앞의 색이 달리 변한다. 다채로운 색의 향연에서 노랑과 초록의 조화로. 호화로운 잔치에 참석했다가 단아한 다과회로 자리를 옮긴 기분이다. 무엇이 되었든 꽃의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첨성대는 경주 여행의 중심지답게 이른 아침에도 사람이 많다. 그래도 지금은 봄. 그 복작임마저 기분 좋게 다가온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장면이 사랑스러워서다. 모르는 이들끼리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며 환하게 외친다. “너무 예뻐요~ 자, 찍을게요. 웃어요!” 까르르 쏟아지는 웃음소리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꽃이 된다.
꽃들이 끊임없이 흥성거리는 가운데, 첨성대는 늘 차분하다. 화사한 봄을 즐기는 소란한 사람들을 다정하게 지켜볼 뿐이다. 천년을 그래왔듯이. 그 대비가 경주의 봄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꽃구름에 빠져볼까, 불국사 공원 겹벚꽃
첨성대와 함께 경주 여행의 상징으로 꼽히는 곳이자 경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바로 불국사다. 가봤으니까 혹은 익숙하니까 여행 코스에서 제외하려 했다면 다시 생각해주길. 봄이 무르익은 4월이면 불국사를 감상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진다. 불국사 일주문 주차장이 아닌, 불국사 공영주차장이 목적지가 된다. 겹벚꽃 단지를 보기 위해서다. 주차장에서 몇걸음만 가면 진분홍으로 물든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선 약 300그루의 겹벚나무가 밀밀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겹벚꽃은 벚꽃과 닮았지만 색과 모양새가 다르다. 꽃잎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피어나니 일반 벚꽃보다 훨씬 풍성하고, 빛깔도 한층 진한 분홍이다. 가볍게 흩날리는 벚꽃과 달리 겹벚꽃은 꽃송이 자체의 밀도가 높아 나무 전체가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인다. 화려하고 도톰하다. 꽃 하나의 무게가 다르달까.
오솔길 양쪽으로 진분홍 꽃구름이 이어진다. 길 위에 꽃잎이 떨어져 쌓이는 모습은 따로 연출하지 않아도 충분히 극적이다. 풍성한 꽃길은 자연스레 천년 사찰로 이어진다. 몇번이고 마주했던 불국사가 달리 보이는 새로운 감각이다.
대릉원의 목련이 경주의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면, 불국사의 겹벚꽃은 경주의 봄이 절정을 맞이했음을 선언한다. 겹벚꽃은 일반 벚꽃보다 1~2주가량 늦게 피기에 벚꽃이 질 즈음 비로소 만개한다. 벚꽃 시즌이 끝났다는 아쉬움을 안고 경주를 찾는다면 여기서 뜻밖의 위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나른한 봄날의 산책, 선덕여왕길 겹벚꽃
선덕여왕길
불국사 공원이 겹벚꽃계의 전통적인 강자라면, 선덕여왕길(사진)은 떠오르는 핫플이다. 명활성에서 시작해 선덕여왕릉까지, 선덕여왕의 발자취를 따라 평탄하게 이어지는 길은 누구나 편히 걷기 좋다. 전체 길이 약 6.1㎞ 중에서 숲머리길에 해당하는 약 2㎞ 구간이 하이라이트다. 겹벚꽃이 만개하면 꽃 터널이 열리기 때문이다.
같은 겹벚꽃이라도 불국사 겹벚꽃 단지의 화려함과는 결이 다르다. 채도가 옅은 분홍이 하늘거리고, 옆으로는 실개천이 흐르며, 사람도 많지 않다. 앙증맞은 포토존과 벚나무 아래 벤치까지 더해지면 봄날의 여유가 이런 것이구나 싶다.
발아래 흙을 느끼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바라보다 보면 느긋하고 나른해진다. 실제로 신발을 벗고 걷는 이들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봄의 흙은 아직 차갑지만 그 감촉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일상에서 쌓인 무미건조함이 발바닥에서부터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든다.
실개천을 따라 걷다 보면 꽃잎이 물 위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마주치기도 한다. 흐르는 물과 떨어지는 꽃잎이 만나는 순간은 꽤 오랫동안 발을 붙잡아 둔다. 사진을 찍으려다 그냥 눈으로 담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그런 장면이다. 길의 끝에는 진평왕릉이 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이 잠든 자리다. 능 주변으로도 봄꽃이 피어 있어 산책의 마무리로 손색이 없다.
여유를 잔뜩 부려도 오고 가는 데 두 시간이 채 안 걸리니 부담 없는 산책 코스다. 봄 경주를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조용하게 즐기고 싶다면 선덕여왕길이 그 답이 될 것이다. 이 길에서는 어떤 속도로 걸어도 봄이 따라오기에.
봄은 다시 피어나니까, 황룡사지 유채꽃밭
같은 시기, 분황사와 황룡사지 사이에는 노란 물결이 인다. 약 1만평의 드넓은 들판에 유채꽃과 청보리가 함께 심겨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랑과 초록이 번갈아 일렁인다. 사람이 공을 들여 조성한 정원이나, 열을 맞춰 늘어선 꽃나무와는 다른 자연스러움이다. 탁 트인 들판에 툭 풀어 놓은 듯 펼쳐지는 풍경이 편안하고 넉넉하게 다가온다.
유채꽃은 화려하지 않다. 다른 지역의 유명 유채밭과 비교하면 작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곳엔 신라의 역사가 묵직하게 흐른다.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된 사찰로, 국보인 모전석탑이 경내에 서 있다. 바로 옆은 완공까지 93년이 걸렸던 황룡사의 터다. 신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사찰은 고려 고종 때 몽골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다. 불은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지금 남은 것은 넓은 기단과 주춧돌뿐이다. 그 위에 유채꽃이 핀다. 사라진 것들이 남긴 자리를 봄이 채운다. 새삼 비장해지지만, 그저 현재에 집중하기로 한다. 늘 그렇듯 봄이 왔고, 그렇게 꽃이 폈고, 오늘 여기에 내가 서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꽃밭 한가운데에는 보물로 지정된 분황사 당간지주가 우뚝 솟아 있다. 그 너머로는 황룡사 역사문화관과 황룡사 터가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분황사 모전석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경주가 아닌 다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장면이다.
봄꽃 사이를 달리는 초록, 비단벌레 전동차
비단벌레 전동차
경주 동부 사적지에는 특별한 탈것이 있다. 이름도 예쁜 비단벌레 전동차(사진)다.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비단벌레 장식이 모티브가 된 친환경 전동차로, 영롱한 외관이 경주의 봄 풍경과 꽤 잘 어울린다.
전동차는 첨성대 옆 매표소를 출발해 계림을 지나 경주향교, 최 부잣집, 교촌마을, 월성을 거쳐 꽃밭과 첨성대로 돌아온다.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창밖으로 펼쳐지는 경주가 다채롭다. 골목이 스쳐 가고, 고분의 완만한 곡선이 지나가며, 튤립 꽃밭이 등장한다. 각 장소에 얽힌 역사와 문화 해설도 함께 이어진다. 걷는 것보다는 조금 빠르고, 차를 타는 것보다는 훨씬 느린 속도가 경주를 보기에 알맞다.
귀여운 외관에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데 주말에는 자리가 일찍 찬다. 경주공공서비스 예약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이 가능하니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