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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원한다면

입력 2026.04.05 19:53

5세기, 멸망 직전의 서로마제국 관료 베게티우스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남겼다. 쇠락하던 제국의 군사적 역량 회복에 초점을 둔 이 호소는 오늘날 군비 증강 논리로 주로 인용된다. 2024년 전 세계 군비 지출은 2조7180억달러를 기록했고, 1억2320만명, 즉 인류의 70명 중 1명이 전쟁과 폭력으로 고향을 떠났다. 이쯤 되면 인간이 원하는 것이 평화인지 전쟁인지 아리송하다. 하긴, 우리는 단테가 <신곡> 지옥편에서 폭력의 죄를 범한 이들을 벌하는 ‘피의 강’에 대사 하나 없이 등장시킨 알렉산더 같은 파괴적 군주에게 ‘대왕’의 칭호를 붙여주는 문명에서 살고 있다.

평화는 늘 위태로웠다. 2500년 전 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자는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5조처럼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비공(非攻)을 설파하고 침략당하는 나라에 방어 기술을 제공했다. 하지만 현대적 방어 기술이라 할 비대칭 전력 증강은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안보의 역설’을 야기하고 있다.

바다 건너 서구의 대표적 평화론자인 이마누엘 칸트는 1795년 <영구평화론>에서 이런 역설을 없애기 위해 상비군 폐지를 주장하고 공화정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다. 전제정이 아닌 공화정에서라면 자유로운 시민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국가 간 협력에 나설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의 적대감을 정치적 자산으로 환전하는 데 능한 연성 독재가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칸트 평화론의 전제를 흔든다.

시대를 건너 현대의 평화론자 요한 갈퉁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와 빈곤·차별·억압이라는 구조적 폭력까지 해소된 ‘적극적 평화’를 구분했다. 평화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안보란 그저 침략 가능성이 부재하는 상황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안전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평화를 상상하는 힘이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평천하(平天下)’의 ‘평(平)’이라는 말에서 누군가는 시황제의 군사적 평정을 떠올릴지 모른다.

전쟁에도 극명한 양면성이 있다. 첫째, 국제 규범들은 전쟁의 범위를 제한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결국 민간인들의 희생, 통신·교통·식수·주거·병원·전기 등 필수적인 인프라의 파괴가 수반된다. ‘승자의 저주’는 기업 인수·합병뿐 아니라 전쟁에서도 발생한다. 더구나 이 세계는 너무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꼭 이 땅에서 전투가 벌어져야 고통받는 것이 아님을 중동발 휘발유 가격 상승과 주식시장 혼란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보여준다.

둘째, 전쟁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중대한 타협이기도 하다. 정부는 외교·군사적 전문성을 논하면서 전쟁이라는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과 정보를 독점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시민은 소외된다. 얼마 전 작고한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어떠한 전문적 의사결정도 시민들과 소통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늘 이런 원리 적용의 예외가 된다. 정보 비대칭 상황에서 경제는 널을 뛰고, 시민들은 토론 능력을 상실한다.

셋째, 전쟁의 목적이 평화라지만 정작 평화를 말하는 자들은 위태로웠다. 로마와 지중해 패권을 다투던 카르타고는 마지막 포에니 전쟁에서 평화를 약속하는 로마의 기만에도 일방적으로 무장을 해제했다가 포위당한 채 평화론자들을 먼저 스스로 죽이고 항쟁하다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런 이야기는 반복되고, 긴장이 고조될수록 평화를 지향하는 목소리는 실제보다 과소대표된다.

평화 유지는 말처럼 평화롭지 않다. 평화는 현실 감각과 고도의 전문성, 윤리적 판단력을 요구하는 장기적이고 집단적인 기획이다. 값비싼 승리보다 공생의 길을 모색하는 현실주의적 태도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평화가 관료 공학의 걸작인 양 보인다. 평화는 인간이 삶과 폭력에 대한 내면적 모순을 견디는 윤리적 힘이다. 역사에 이따금 나타나는 거대한 악을 마주하고 싸우는 것이 진정 평화를 지향하는 일일 때도 있다. 도발을 외면할 수 없을 때도 있고, 시작된 전쟁 앞에 무기를 버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쟁이 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전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한반도가 언제 다시 격랑에 휩쓸리게 될지 알 수 없다. 전쟁의 가능성은 삶의 희망과 풍요를 야금야금 갉아먹을 것이다. 인구, 기후, 분쟁의 위협 가운데 평화의 길들을 모색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해야 한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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