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은 청년을 봄과 여름으로, 중년과 노년을 가을이나 겨울로 묘사하곤 한다. 어떤 철학자에게 청년은 펄펄 뛰는 심장이며, 희망, 용기, 기쁨, 곧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그러니 젊은 그가 세상에 대한 냉소와 비겁한 태도를 갖는다면, 그는 청년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일상에서 희망, 용기, 기쁨을 나누는 노년이 있다면, 그는 두근대는 심장의 아름다운 청년일 수 있겠다.
2024년 12월14일 윤석열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에 추운 광장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1947년생 어떤 한국 “할아버지”를 외신이 포착해 전 세계로 전한 것은 가을빛 그에게서 봄빛 청년을 발견한 흥분과 감동 때문이었으리라. 한국전쟁, 4·19 혁명, 민주화 투쟁 등 험한 한국 현대사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을 더 좋은 사회에 대한 희망,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고령에도 한겨울 광장으로 담대하게 나섰을 용기, 그리고 마침내 날아든 희소식에 요동쳤을 그의 심장은 청년의 심장 바로 그것이었을 테니까.
4년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 시민출근 볼모, 비문명 등 막말로 수십년간 이동권 결핍을 견뎌온 시민에게 비수를 꽂은 자가 ‘청년’ 정치인이라 했다. 작년 TV 대선 후보 토론에서 세계 어떤 정치인에게서도 들을 수 없을 참담한 수준의 여성혐오 발언을 쏟아낸 자가 바로 ‘그 청년’이라고 했다.
그를 닮으려는 또 다른 ‘청년’ 남성 정치인은 장애가 있는 여성 정치인이 두 번 비례대표 의원이 된 것을 두고, 장애를 제외하면 기득권인 그 여성이 자신의 “일부 약자성을 무기 삼는”다고 말해, 재작년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사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뇌 썩음’(brain rot)의 ‘한국 청년판’ 실체를 보여줬다.
또 다른 ‘청년’ 남성은 6월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그 청년’과 야당 측 유력 대선 주자 두 명의 연대를 제안한 보수 원로를 향해 “늙은이들 제정신인가?”라고 말해, 듣는 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공동체에 기쁨과 감동을 전파할 그 어떤 용기 있는 행동도 못하면서, 입과 손가락으로 공론장을 오염시키는 ‘그 청년’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비문명적 정치’를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무지하고 무례한 ‘그 청년들’보다 조금은 나아 보인 ‘이 청년’이 유독 반가웠을 테다. ‘그 청년들’과 달리, 가끔은 따뜻해진 심장으로 ‘이 청년’이 공동체에 이로운 뭔가를 해낼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이 청년’이 여당 측 서울시장 경선 후보의 기관장 시절 해외 출장을 문제 삼으며 제기한 내용이 근거도 불분명한 데다, 동행한 11명 속 한 여성 공무원을 대상화하며 ‘자극성’까지 더함으로써 ‘이 청년’이 ‘그 청년’의 아바타일 뿐, ‘청년’ 정치가 기성정치의 대안일 수 없음이 드러났다.
이렇듯 동료 시민을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유교적 여성관에 기대 구태를 반복하는 이들이 ‘청년’ 정치인이라면, 그래서 한국 유권자들이 여전히 정치를 통해 기쁨과 희망, 용기, 그리고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왜 ‘청년’ 이들을 견디듯 정치판에 남겨두어야 하는가. ‘이 청년’의 헛발질을 보며 ‘청년’ 정치인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임윤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