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3년 만에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 출간
은유·상상·묘사 가득한 시인의 언어로 엮은 53편 수록
은이정 시인의 첫 시집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
2023년 ‘시와경계’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은이정 시인의 첫 시집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걷는사람)이 나왔다. 등단 3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는 표제작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 등 총 53편이 수록돼 있다.
이번 시집은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과 완성도가 돋보인다. 김정수 시인은 해설에서 “은이정의 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당연하지 않은 ‘낯선 시선’으로 접근해 새로움을 창조한다”고 했다. 또한 “식당, 카페, 병원 등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의 공간을 시적 무대로 소환해 건조한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의 균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며 “‘음식’과 ‘조리’의 감각을 중심으로 감정과 기억, 돌봄과 소멸의 장면을 갈고, 절이고, 끓여 내며 낯선 언어로 재구성한다”고 했다.
“하나씩 처치할 시간이야/ 냉장고 파먹기처럼// 베개는 얇게 소금에 절여/ 껍질을 벗기기 어렵다면 채 쳐도 좋고 시트는 꼭 짜서 한쪽으로 밀어 두면/ 가끔은 갈피에서 돈이 나오기도 하지 찢어진 건 버리고 동전만 따로 모아/ 고명으로 올리면 그럴듯하단다”(‘늙은 딸에게 주는 레시피’ 부분)
시집 첫머리를 장식한 이 시는 늙은 엄마가 같이 늙어가는 딸에게 자신의 몸과 요양 병원의 소품들을 식재료로 둔갑해서 보여준다. 베개, 시트, 매트리스, 기저귀 조각, 링거, 슬리퍼 같은 요양 병원의 사물들과 틀니, 항문 같은 신체어를 소금에 절이고, 채 치고, 고명을 올리는 조리 과정의 어휘가 난무한다. 일방적이고도 오래된 관계의 피로와 사회의 비정함을 레시피로, 노쇠와 돌봄을 요리라는 은유를 통해 관계와 존엄이 해체되는 과정을 조금은 잔혹하고도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레시피는 생존의 매뉴얼이자,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늙은 엄마는 늙은 딸을 더 힘들게 하겠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는데,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마의 화법을 빌린 딸의 하소연이다.
표제시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은 이번 시집의 문제의식을 집약하는 작품이다. 동물들이 서로의 몸과 역할을 맞물려 의자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함께 균형을 찾아가는 은유적 장면으로 읽힌다. 시인은 의자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희생과 책임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죄의식의 층위를 세밀하게 배치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잠깐의 안식이 결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과 감각 위에 겨우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흔들림을 전제로 하면서도 끝내 앉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가 곧 삶을 견디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상상력은 동시대의 구조적 현실을 향한 통찰로 확장된다. 시 ‘시신이 제일 고생이죠’에서는 국경을 넘는 시신과 상품이 뒤섞이는 장면을 통해 세계의 비정함을 드러내고, 시 ‘환영해 Zoom’에서는 비대면 노동의 풍경을 “냄새 빠진/ 정물의 세상”으로 형상화해 감각이 제거된 삶의 단면을 포착한다. 시 ‘허그 로봇의 결례’에서는 포옹마저 기능화된 상황을 통해 돌봄의 의미와 인간성의 조건을 되묻는다. 시집 전반에서 감정은 직접 진술되기보다 물성과 절차로 치환된다. 그 결과 건조한 방식 속에서 감정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은유와 상상, 묘사로 점철된 시인의 언어를 뒤적이다 보면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 사람은 특정 관계에 힘들어하고, 연민하고, 죄스러워하면서 애달파한다. 선뜻 다가가 안기거나, 안아주는 것조차 결례는 아닌지 조심스러워한다. “끌어안고 돌보고 구하는 일”(‘토끼 씨의 언덕’)을 힘들어하며, 날마다 죄를 쌓아가는 상황을 오롯이 견뎌낸다. 시인은 연약한 듯하지만, 한없이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