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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피는 꽃

입력 2026.04.07 19:53

수정 2026.04.0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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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유명한 노래 가사처럼 봄바람이 불며 여기저기 벚꽃이 만개했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 사이를 걷다 보면 그 눈부신 생동감에 마음까지 환해지며 어느새 봄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활짝 피어난 꽃들 사이에서 이제야 수줍게 꽃망울을 맺은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김마리아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봄이 왔다고 다 서둘러 꽃이 피나요? 늦게 피는 꽃도 있잖아요.” 어떤 꽃은 일찍 피어나 우리를 설레게 하고, 또 어떤 꽃은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때를 기다린다.

이러한 모습은 예술가들의 삶에서도 발견된다. 미국의 국민 화가 그랜마 모지스는 78세에 처음 붓을 들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00세에도 그림을 25점이나 그렸다. ‘한국의 그랜마 모지스’라 불리는 김두엽 화가 역시 83세에 그림을 시작해 9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7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들의 삶은 우리에게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버니스 뉴가튼 교수는 ‘사회적 시계’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가 개인에게 특정한 삶의 시간표를 암묵적으로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언제 취직하고, 언제 결혼하고, 언제 은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다.

이 시계는 때로는 우리를 재촉하고, 때로는 늦었다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조금만 늦어도 “왜 아직도?”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마치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재촉하듯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회적 시계는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결혼과 출산의 시기는 이전보다 다양해졌고, 이를 선택하지 않는 삶 또한 하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은퇴 역시 더 이상 정리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누구는 20대에 방향을 찾고, 누구는 50대에, 또 누구는 70대에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예전에는 늦었다고 여겨지던 기준이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늦게 시작해 삶을 꽃피운 사례는 적지 않다. 시니어 인플루언서 박막례 할머니는 70대 초반에 치매 위험 진단을 받은 후 손녀와 함께한 여행 영상으로 유튜브를 시작해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고, 2024학년도 수능 최고령 수험생으로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정자 할머니는 85세에 학사모를 썼다.

또한 늦은 나이에 한글을 깨쳐 자신의 이름을 직접 쓰며 눈물을 흘렸다던 어느 80대 어르신의 이야기는 배움과 성장이 결코 나이에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삶은 ‘늦었다’는 말이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인생의 후반기에 꽃을 피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 늦었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내려놓는 용기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젊고 빠른 때이다. 둘째,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시간이다. 셋째, 작더라도 지속하는 실천의 힘이다. 젊은 시절에는 해야 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하고 싶은 일에 조금 더 귀 기울여도 된다. 삶의 경험이 쌓인 만큼, 그 선택은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해질 수 있다.

흔히 인생의 후반부를 정리의 시간이라 말하지만 노년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는 시기이다. 전 생애발달적 관점을 제시한 독일 심리학자 파울 발테스 역시 인간의 발달은 특정 시점에서 멈추지 않으며, 삶은 후반기에도 충분히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꽃은 여러 번 피고, 또 어떤 꽃은 늦게 피어 더 오래 향기를 남긴다. 꽃마다 만개 시점이 다르듯 인생의 만개 시점 또한 저마다 다르다. 늦게 피면 어떠한가. 어쩌면 가장 깊은 향기를 남기는 꽃은 바로 그 늦게 피는 꽃일지도 모른다. 올봄, 나는 늦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가 더 기다려진다.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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