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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는 더 망해봐야 한다

입력 2026.04.07 19:54

수정 2026.04.0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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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고 국제유가가 한 달 만에 두 배 넘게 치솟는 동안,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국회 본회의장을 찾아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를 호소했다. 대통령은 속도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채를 발행하지 않는 ‘빚 없는 추경’임을 분명히 하면서, 초과세수 25조2000억원과 기금 재원 1조원을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이 이 전후로 내놓은 말들이 있다. “전쟁 핑계 추경, 선거용 매표 추경을 합리화시키는 정치 연설” “선거 후 세금 핵폭탄을 떨어뜨리기 위한 달콤한 마취제” “현금 살포, 재정 살포로 돈을 풀면 물가 상승을 자극하고 경제에 악영향”. 위기의 시계는 계속 돌아가는데, 꺼내 든 무기는 경제학원론도 채 안 되는 수준의 논리들이다. 이래서 한국 보수는 더 망해봐야 한다. 지적으로 게으르고, 이념은 과잉이다.

한국은행이 이미 밝혔지만, 지금 한국 경제는 국내총생산(GDP) 갭이 마이너스, 즉 잠재 생산능력을 밑도는 상태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는 재정을 투입해도 물가를 밀어 올리는 경로 자체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에 반도체만 잘나가는 K자형 성장 구조까지 겹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잘 돌아간다 해도, 자영업자는 어렵고, 구직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삼겹살집이 있는데 테이블 10개, 종업원 2명이다. 현재는 테이블 4개 정도 차는 거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 테이블 8개가 찬다고 치자. 그러면 종업원 두 명을 늘리고 인건비가 두 배로 뛰어서 가격을 두 배로 올리겠나? 당분간 현재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는 거다. 즉, 이번 추경이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런데도 이들은 “물가 자극”을 외친다. “빚잔치”라는 비판은 아예 사실 오류다.

그렇다면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이 주장들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무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배후에 이념이 있다. 이들의 논리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좌파 정권이 포퓰리즘 지출을 남발하다 경제가 붕괴한다는 것. 그 인식 틀의 원형이 베네수엘라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재정 지출 그 자체가 아니었다. 차베스·마두로 정권은 고유가에 기댄 복지 지출을 2014년 국제유가 폭락 이후에도 줄이지 않으면서 재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세수가 사라진 자리를 중앙은행의 무제한 화폐 발행으로 메웠고, 통화량이 통제 불능으로 팽창하면서 2018년 물가상승률이 100만%를 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재정 지출 그 자체가 아니라, 세수 기반도 없이 중앙은행의 화폐 발행으로 지출을 무한정 떠받친 결과였다.

한국은 이미 걷힌 초과세수로 추경을 편성한다. 화폐를 찍어내지 않는다. 무디스·S&P·피치 세 곳 모두에서 최상위권 신용등급을 유지하는 나라다. 세계 10위권 수출국이자 제조업 강국이다. 이 나라에서 베네수엘라가 보인다면,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이념이 만들어낸 공포다. 한국의 보수는 극렬 선동가가 되었다. 그들 앞에서는 경제 분석도, 사실도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논리의 위험성을 우리는 직접 경험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유동성 위기를 재정 방만으로 오진단하고 연 20%대의 고금리와 긴축재정을 처방했다. 우량 기업조차 고금리와 자금난 때문에 부도를 당했고, 1300여 기업이 법정관리로 쓰러졌다. 실업률은 2.6%에서 8.7%로 3배 넘게 치솟았고, 국내총생산은 1년 만에 5.5% 역성장했다. 세계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극단적 고금리와 재정 긴축이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 경고했고, 그 경고는 정확히 맞았다. IMF 스스로도 나중에 “긴축재정 정책은 위기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대표적 실책”이라고 인정했다. 나아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정책 기조 자체를 바꿨다. 그런데 그 잘못된 처방을 한국 보수는 자국민에게 들이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시 미국 경제성장률은 2008년 4분기 8.4% 역성장을 기록했고 실업률은 10%까지 치솟았다. 미국 정부는 주저하지 않았다. 7000억달러 규모의 부실자산 구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오바마 행정부는 취임 직후 대규모 경기 회복법에 서명했다. 이후 학자들은 만약 개입이 없었다면 어땠을지를 추산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전 부의장 앨런 블라인더와 무디스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의 분석에 따르면, 정부 개입이 없었을 경우 실업률은 16%까지 치솟고 일자리는 1700만개가 사라졌을 것이다. 개입의 비용이 아무리 크더라도, 개입하지 않았을 때의 비용은 언제나 그것을 뛰어넘는다. 역사는 “기다려서 잘됐다”는 사례를 남기지 않았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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