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부터 시행된 도로교통법 개정안 관련
학회 “일률 금지는 현대 의학 원칙에 반해”
정신질환 환자 ‘낙인’ 강화 우려도 지적
최근 약물 운전 단속 및 처벌 기준이 강화됐는데, 기준이 모호해 정신질환자들이 치료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진은 경찰이 음주단속을 하는 모습. 성동훈 기자
약물 복용 후 정상적인 운전이 어려운 상태에서 차량을 운행할 경우에 대한 처벌이 최근 강화됨에 따라 약사단체가 복약지도가 필요한 약물 400여종을 안내했는데, 이를 두고 기준이 너무 넓고 모호해 정신질환 환자들이 치료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8일 성명을 내고 “정신질환 치료 약물에 대한 일방적 운전금지 규정은 비과학적이며, 환자의 치료 중단이 오히려 교통안전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2일 약물 운전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개정안은 약물 운전 처벌 수위를 기존 ‘3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에서 ‘5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상향했다. 지난 2월 서울 반포대교에서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30대 여성이 몰던 차량이 난간을 들이받고 한강 둔치로 추락하는 등 관련 사고가 잇따르면서 처벌과 단속 기준이 강화됐다.
도로교통법은 약물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상 마약·향정신성의약품 및 대마, ‘화학물질관리법’상 환각물질 등으로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 대한약사회는 이에 따라 386개 의약품 성분을 ‘단순주의’부터 ‘운전금지’까지 4단계로 분류해 회원 약국에 안내했다. 운전금지 성분에는 인슐린(당뇨병 치료제), 졸피뎀(불면증 치료제), 모르핀(마약성 진통제) 등이 포함됐다.
학회는 이 같은 분류 기준이 과도하게 단순화돼 있다고 비판했다. “특정 약물의 초기 부작용만을 근거로,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복용해 온 환자에게까지 일률적으로 ‘운전금지’를 적용하는 것은 현대 의학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학회는 약물 복용 초기와 유지기의 부작용 양상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주치의의 판단 없이 성분만으로 불특정 다수의 운전 가능 여부를 일률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했다.
광범위한 운전금지 기준이 정신질환 환자에 대한 낙인을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학회는 “질환의 중증도나 개별적인 의학적 상태를 배제한 채 일방적인 가이드라인을 유포하는 것은 정신질환자와 의학적 필요에 의해서 적절한 의학적 관리하에 중추신경계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들을 ‘도로 위의 시한폭탄’으로 매도하는 구조적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유사한 논란은 지난해 방송인 이경규씨의 약물 운전 사건 당시에도 제기됐다. 당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진승씨는 “정신과 약을 먹으면 무조건 위험하다는 인식은 가뜩이나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높은 우리나라 사회에서 치료를 주저하게 만들 수 있다”며 “치료를 받지 않아 공황발작이 운전 중에 일어나면 오히려 사고 위험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글을 올렸다.
학회는 담당 전문의의 개별적 임상 평가를 법적 기준의 핵심으로 삼는 국가 차원의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범죄 목적의 약물 오남용이 아니라, 의학적 관리 아래 합법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에 대해서는 단속과 형사 처벌을 면제하는 등 인권 보호 장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