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제주올레 제공
대부분의 도보 여행기는 깨달음으로 충만하다. 여행에선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마련이니 실패를 통해 겸손해지는 경우가 많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종주’ 실패담일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브라이슨이 미국으로 돌아와 애팔래치아 트레일(AT) 종주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렸다. 1996년 길을 떠난 브라이슨은 3360㎞에 달하는 코스를 완주하진 못했다. 하지만 완주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린 시도했다”는 그의 말처럼 도전만으로도 의미 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6년 9월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언론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했다. 일중독에 빠져 있다 ‘번아웃’된 상태였다. 800㎞ 순례길을 완주하며 위안과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듬해 ‘고향 제주에 길을 내겠다’며 귀향했다. 제주 올레길의 시작이었다. 세상은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이들 때문에 종종 바뀌곤 한다. 2007년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설립됐고, 같은 해 9월 제주올레 1코스가 마침내 문을 열었다. 2022년 총 27개 코스로 이뤄진 지금의 올레길이 완성됐다. ‘올레’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한국에 제주 올레길 같은 아름다운 길이 생긴 것은 서 이사장 덕이다.
“올레길을 직접 걸으면서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상처받은 마음을 올레에서 치유하기를, 가파른 속도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기를, 잠시라도 일중독자에서 ‘간세다리’(느리고 게으른 사람)가 되어보기를.”(책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프롤로그 중) 서 이사장의 철학은 ‘놀멍 쉬멍 꼬닥꼬닥(놀며 쉬며 천천히)’이었다. 번아웃에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천천히’ 살자며 위로를 건네던 그가 지난 7일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안은주 제주올레 대표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올레길에서 행복하라”였다고 한다.
오늘도 올레길에선 바다와 감귤을 상징하는 파란색·주황색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누군가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를 수 있으리라. 당신은 그곳에서 “제발 천천히”라며 미소를 보낼 것이다. 고인이 행복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