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3년차에 접어든 1594년 음력 2월14일, 오희문은 슬픔을 억누른 채 길을 나서야 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잠시 다른 피란처에 있던 어머니를 뵐 수 있었지만, 여전히 떨어져야 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전쟁은 그렇게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들었지만, 그나마 양반이어서 가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달랐다.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다 금구 땅(지금의 전북 김제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오희문은 길가에 거적으로 덮여 있는 시신을 보았다. 전쟁통에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지 못해 길거리에 시신이 나뒹구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옆에서 울고 있는 두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거적에 덮여 있는 시신은 두 아이의 어머니로, 굶주림과 병으로 전날 죽었다고 했다. 전쟁보다 더 잔혹한 겨울은 겨우 넘겼지만, 따뜻한 바람 속에 숨어 온 보릿고개의 초입을 견디지 못해 생명줄을 놓아 버렸다.
아이들의 울음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은 시신을 땅에 묻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두 아이 힘으로 시신을 옮길 수도 없었고, 땅을 팔 연장 하나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여인이 광주리에 호미를 들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저 호미라도 있으면 땅을 파고 어머니를 묻을 수 있으리라는 두 아이의 말에 오희문의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호미 하나 구할 수 없어 어머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도 없는 상황이 이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비단 두 아이에게만 닥친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구 땅에서만 굶어 죽어 길에 나뒹구는 시신이 수십 구여서, 오희문이 하나 하나 세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조선은 전쟁 없는 일상에서도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죽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 전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맞은 보릿고개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사망한 이들을 묻는 일도 한계를 넘었고, 그렇게 호미 한 자루 없어 시신들이 길에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일상이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살아 있는 백성들 역시 죽은 이들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길거리는 쑥대머리에 때 묻은 얼굴을 한 많은 피란민이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목적지 없이 떠돌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이미 반쯤은 목숨을 내어 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길을 떠돌다 배고픔이나 병으로 걸음을 멈추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쳐 왔던 많은 시신과 다를 바 없어졌다. 이렇듯 전쟁은 백성들을 적의 칼에 죽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로 내몰았다(오희문, <쇄미록>).
그런데 언론 보도만 보면, 2026년의 전쟁은 이와 다른 듯하다. 전쟁터가 된 이란 내부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 하루에 수조원씩 들어가는 전쟁 비용과 치솟는 유가로 몸살을 앓는 세계 경제 문제만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매일 수백 발의 미사일과 공중 폭격, 그리고 무력에 의해 봉쇄된 경제 상황을 몸으로 겪는 이들의 일상은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채 말이다. 피격 조종사 한 명의 목숨에 쏟아지는 과도한 관심에 비해, 폭격으로 폭사한 일반인 수천명의 생명은 한 줄 뉴스로 처리되고 있을 따름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건 조선 침략의 이유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트럼프 미 대통령의 전쟁 이유 역시 정치하는 이들의 정치적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 때문에 전쟁터에서 사는 일상인들은 호미 한 자루도 구하지 못해 부모의 시신조차 묻을 수 없는 현실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당위와 필요를 역설하는 그 어디에도 전쟁으로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일상인들의 삶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사실이, 오늘의 일상을 사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