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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전성시대, 이야기와 서사의 위기

입력 2026.04.08 19:57

  •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기사를 재생 중이에요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기술의 진보와 함께 만개한 글로벌 OTT 시대, 화려하고 밀도 높은 K콘텐츠의 서사에 피로를 느낀 대중은 오히려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역사 기반의 인간적 이야기와 만듦새를 둘러싼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뜻밖의 공명을 보였다.

특히 실패한 인물에 대한 동일시와 상상은, 일상에서 몸과 마음이 소진되고 정서적 허기를 느끼는 오늘날 대중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공감은 입소문으로 이어지며, 이른바 영화와 극장이 위기에 직면한 시대에 하나의 반전 신호를 만들어냈다. 초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휴민트>와의 경쟁 구도가 예상됐고, CG와 일부 출연자의 연기에 대한 아쉬움도 제기됐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진솔한 서사의 힘으로 3월 말 기준 한국 영화 역대 관객 수 3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동시에 이 현상은 콘텐츠가 주도하는 문화 시대의 긴 그림자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다. 연출과 완성도를 둘러싼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단종의 비극적 서사에 몰입하는 이유는 단종과 엄흥도의 신분을 초월한 인간적 교감과 우정이라는 메시지에 있다. 여기에 분절된 릴스형 장면 전환과 감정 전달 방식이 관객의 짧은 호흡과 집중력에 맞물린다는 점도 작용한다.

이는 오늘날 AI 생성 콘텐츠가 쏟아지며 수사적 장치만 남발되면서 정작 중요한 정보와 의미는 희석되는 현상과 닮아 있다. 그 결과, 깊이 있는 사유를 요구하는 서사적 완성도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지루하더라도 진정성을 담보한 서사가 위기에 놓인 이유와도 무관치 않다. 화려한 CG나 세련된 연출 없이도 강한 감정 반응을 이끌어내는 콘텐츠가 주류가 되면서, 내용과 형식의 완결성보다 순간적·감각적 공감이 우선되는 문화적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과거 드라마 <미생>은 청년 실업자의 직장 내 애환과 분투를 섬세한 심리 묘사로 그려내며, ‘인턴에서 정규직’이라는 보편적 열망에 사회 비판을 녹여 진정성 있는 공감을 이끌어냈다. 또한 독립영화 <벌새>는 1999년 한 소녀의 기억과 상처를 느린 호흡으로 풀어내며 청소년이라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재현했고, <변호인>은 노무현의 변호사 시절을 바탕으로 억압된 노동자와 민주화운동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이들 작품은 세밀한 캐릭터 구축과 사회 구조에 대한 복합적 성찰, 나름의 대안적 전망을 함께 제시했다. 이러한 접근은 대중 친화적 스토리텔링을 유지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서사로 약자와 소수자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이 충분히 가능함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는 산업 생태계와 문화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구현할 방법 혹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서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역사적 향수를 상품화하는 콘텐츠와 스토리의 과잉은, 로버트 맥체스니가 <풍요로운 미디어, 빈곤한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듯 정보의 과잉이 오히려 깊이 있는 민주주의와 문화적 성찰을 약화시킨다는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영화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고, 오늘날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는 순기능도 지닌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진지하고 깊이 있게 다루기보다 대중의 정동에 호소하고 강한 감동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은, 흥행에는 유리할지라도 서사의 위기를 초래한다. 이는 쇼트폼을 중심으로 한 뉴미디어의 즉각적 공감 구조가 지배하는 시대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느린 호흡의 서사는 분절된 감정의 응축과 폭발로 대체되고, 관객은 삶의 복잡한 맥락을 사유하기보다 찰나적 카타르시스에 머물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플랫폼 알고리즘을 넘어 콘텐츠 자체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령 심화되는 인간 소외와 물화, 공정과 사회적 정의를 둘러싼 대중의 정서적 결핍을 선택적으로 채운다. 맥체스니가 미디어 기업의 상업화가 민주적 숙의를 왜곡한다고 비판한 것처럼, 콘텐츠의 과잉과 풍요는 역설적으로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다층적이며 진실한 서사의 위기로 연결될 개연성이 높다.

그 결과, 콘텐츠는 삶의 실제 리듬과 달리, 즉각적인 감응과 미감의 충족에 치중하게 된다. 깊이 있는 공감 대신 강한 분노와 분열, 단절의 감정이 순환되고,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해법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정치적 양극화와 에코 체임버 현상 등, 소통 단절과 연관된 사회·문화적 위기로 이어질 위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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