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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력과 운

입력 2026.04.08 20:00

실력만으로 성공하기는 어렵고, 운만으로 오래 버틸 수도 없다.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려면 지나온 경로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노력과 재능 역시 시대적 상황과 맞아야 비로소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음에 주목한다. ‘시대적 운’에 대한 자각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미래를 냉정하게 개척해 나가는 출발점이 된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경이롭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지만, 오늘날에는 제조업·기술 강국이자 문화 선도국으로 성장했다.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함께 이룬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한·중·일의 경제발전 과정을 보면 토지개혁, 인적자본 투자, 세계시장 편입, 정부 주도 산업정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미국 주도의 전후 세계질서라는 경제 환경 속에서 가능했다. 중국 역시 미국이 주도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체제의 수혜국이다. 한국은 미국의 안보우산과 규칙 중심 질서 속에서 수출 주도형 성장전략을 추진할 수 있었다. 여러 위기를 넘고 힘들게 적응해왔지만 시대 상황이 오늘의 성과를 가능케 했다.

세상은 다시 변화하고 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전후로 미국 사회에는 심리적 변화가 나타난다.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이나 지역 분쟁 개입, 글로벌 이슈 해결 같은 전통적 역할을 내려놓고 국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제조업 쇠퇴, 중산층 붕괴, 빈부격차 등으로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사회적 계약도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제로섬적 세계관과 ‘힘이 곧 정의’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데 그 심각성이 크다.

중국은 19세기 중반 이후 100여년을 ‘치욕의 세기’로 규정하고, 주도국 지위를 되찾고자 한다. 이는 역사의 정상화 과정이며, 세계의 흐름을 ‘서양 쇠퇴-동양 부상’이라고 믿는다. 미국과의 전략 경쟁 속에서, 기술·공급망 자립을 전략으로 롱 게임을 하고 있다. 미국이 관세와 반도체 수출통제로 공격해도 희토류를 무기로 끝까지 싸운다는 기세다.

한국은 성장률 저하가 지속된다. 인구구조의 영향이 크고 투자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 다음이다. 경제가 추격 단계를 넘어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 속도가 빠르다.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 중국과 경합하는 분야에서 더욱 심하다. 중국이 과잉설비와 디플레이션 압력을 수출로 퍼내면 세계의 기업들이 몸살을 앓는다. 고령화되고 성숙한 한국 경제가 새로운 경쟁에 맞서 어떻게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이순신의 13척 배처럼, 우리에게 승부의 카드가 남아 있다면 무엇일까.

첫째, AI라는 기술의 등장이다. AI는 전기·인터넷처럼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혁명적 기술로 자리 잡고 있다. 누가 AGI 모델과 소프트웨어 경쟁에서 최후 승자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한국이 반도체·전력 인프라 등 하드웨어 AI 생태계에서 핵심 역할을 할 것임은 분명하다. 작년이 기술 사이클로 관세 충격을 이긴 해였다면 올해는 에너지 충격을 이겨내는 해가 될 수 있다. AI 기술의 확장은 상방이 아직 열려 있으며, 인구와 지역균형 같은 문제를 푸는 데에도 유용한 도구이다.

둘째, 미·중 라이벌 상황이다. 세계는 다극체제로 전환되고 있다. 미국은 단극에서 물러서고 있지만, 누구도 그 공간을 채울 의지와 능력이 없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큰 봉우리다. 우리에게 안보동맹이자 핵심 기술 파트너다. 분할된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의 반도체·조선·방산·원전은 시장을 지키고 있다. ‘미국 없는 세계’로 가는 과정에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에 찬성하는 국가 간 연대가 모색될 것이다. 연대의 축이 되며 다양한 진영 간 가교 역할을 하는 나라로 입지를 세울 수 있다.

셋째, 소프트파워다. 작년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해였다면, 올해는 ‘BTS 월드투어’로 시작하고 있다. K-팝·드라마·푸드·뷰티가 서로를 강화하면서 국가브랜드로 이어진다. 사람을 모이게 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구슬을 꿰어야 한다. 한국의 상품과 문화를 경험하고 즐기고 기꺼이 돈을 쓰는 데 불편함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전략적으로 문화산업을 연결, 조정하는 K-CCO(최고문화경영자)를 두면 어떨까.

변하는 세상 속에서 한국의 현실을 객관화해 보면 겸손해진다. 시대 상황에 맞게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선택하고 도전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때마침 현실주의 실용정부가 출범했다. 갈라지고 위험한 세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시대의 운’이라면 나쁘지 않다.

이호승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이호승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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