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북부 라스알카이마에서 바라본 호르무즈 해협 인근 걸프 해역에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에 제시한 최종 협상 시한 88분 전에 극적으로 2주 휴전에 합의했지만 유럽연합(EU)의 불안은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판을 벌이면 뒷수습은 유럽이 하는 패턴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재현될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8일(현지시간) 여러 EU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휴전 직후 호르무즈 해협 비용 부담 문제를 놓고 유럽 내부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프랑스, 독일, 영국은 전투가 멈추면 해협 안전 확보를 돕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한 상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를 포함한 15개국이 “여건이 갖춰지는 대로” 해상 교통 재개를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선박 호송과 기뢰 제거 작전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1987~1988년 쿠웨이트 유조선을 이란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벌인 미국 주도의 ‘어니스트 윌 작전’에는 수억달러가 투입됐다. 당시 비용을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10억달러(약 1조5000억원)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오만과 함께 해협 통행료를 부과하는 ‘합작 사업’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면서 유럽 상선들은 전쟁 전엔 없던 비용까지 떠안을 수 있다. 휴전이 유지되더라도 유럽의 에너지 요금은 최소 수 주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모드 브레종 프랑스 정부 대변인은 이날 유가 인하 시점을 묻는 말에 “가격 인하 발표가 소비자에게 실제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겪었다. (인하 가능성을) 낙관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유럽 정치권에서는 노골적인 불만도 터져 나왔다. 유럽의회 외교위원회 소속 나초 산체스 아모르 스페인 사회당 의원은 “가자지구에서는 (유럽이) 재건 비용을 내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사실상 혼자 전쟁 비용을 치르고 있다. 이제는 호르무즈 기뢰 제거 비용까지 내야 할 판”이라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청한 EU 외교관은 “핵심은 이 휴전이 유지되느냐”라며 “우리는 도울 준비가 돼 있지만 이것은 백지수표가 아니다. 올바른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휴전 발표 직후인 8일 중동을 방문해 걸프국 지도자들과 “호르무즈 항행 자유 회복을 위한 실질적 논의”를 진행 중이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사우디아라비아 외교장관, 걸프협력회의 의장과 회동할 예정이다.
이달 말에는 EU 지도자들이 키프로스 니코시아에서 비공개회의를 열어 미·이란 전쟁의 파장과 우크라이나 지원 재원 문제를 함께 논의한다. 한 EU 외교관은 폴리티코에 “우리에게는 세계에 우리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하드파워가 없다”며 “협상과 압박을 통해 상황을 모면하고 피해를 줄이는 데 급급할 뿐”이라고 토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