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위원회, 사용자성 판단 11건 중 10건 ‘인정’
노동계 “교섭 개시에 의미”…재계 “판단 불확실”
‘노란봉투법’이 시행된 지난달 10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원청교섭 쟁취 투쟁 선포대회를 열고 있다. 정효진 기자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 2·3조) 시행 이후 하청업체 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판단이 잇따르고 있다. 하청 노동자에게도 ‘진짜 사장’과 마주할 교섭권이 생긴 것이지만, 노사가 대화 테이블에 마주앉기 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노사의 입장차가 극명한 제도인만큼 안착하는 과정에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제언했다.
9일 취재를 종합하면, 노란봉투법 시행일인 지난달 10일부터 이달 7일까지 노동위원회에 총 278건의 사용자성 판단 신청이 접수됐다. 9일 기준 판단이 내려진 11건 중 10건에 대해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됐다.
첫 원청 사용자성 판단은 공공부문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한국원자력연구원·한국자산관리공사·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었다. 충남지방노동위원회는 지난 2일 “공공기관이 ‘안전관리 및 인력배치’에서 실질적 사용자 지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7일 경북지노위도 한국산업단지공단의 자회사 소속 하청 노조에 대한 사용자성을 인정했다.
7일에는 민간 부문 첫 사용자성 인정 판단이 나왔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인덕대·성공회대 등 사립대학 사건에서 “원청이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을 구체적으로 통제하고, 작업환경 개선 관련 교섭 의제에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다”고 봤다. 같은 날 한국공항공사 사건에서도 자회사 근로자의 연장근로 지시·승인 등 연장근로 체계와 관련한 의제에서 원청의 지배·결정권을 인정했다. 8일에는 국세청 홈택스 콜센터 사건에서 ‘감정노동자 보호 및 작업환경 개선’ 의제에 한해 국세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 다만 직접고용이나 임금·복지 등 다른 의제는 자료 부족 등을 이유로 판단을 보류했다.
포스코는 민간기업 중 처음으로 사용자성이 인정됨과 동시에 교섭단위 분리 신청까지 인정된 첫 사업장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경북지노위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소속 하청노조의 교섭단위 분리를 인정했다. 노조 간 이해관계가 달라 단일 교섭단위 유지 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교섭단위 분리), 산업안전 의제에서는 원청의 지배·결정권을 인정했다(사용자성). 이에 따라 원청인 포스코는 3개 하청노조와 각각 교섭해야 한다.
노란봉투법 시행 한 달 만에 원청과 하청노조 간 첫 교섭이 시작된 곳도 나왔다. 노동계에 따르면 한동대학교는 이날 청소노동자로 구성된 하청 노조와 상견례를 열고 교섭 절차에 들어갔다. 구체적인 교섭 의제는 이달 말 첫 본교섭에서 다루기로 했다.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적정 인력 유지와 업체 변경 시 고용승계 보장이 핵심 요구 사안”이라고 전했다. 이날 교섭은 법 시행 이후 원청이 노동위의 사용자성 판단 없이 자발적으로 교섭에 응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노동계는 하청 노조가 원청과 직접 교섭할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원청이 당연히 져야 할 책임을 확인한 것”이라며 “하나의 교섭 의제만으로도 사용자성을 인정해 교섭을 개시할 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재계에서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현장 혼란이 커지고 있다고 본다.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가 잇따르자 대부분 기업은 ‘무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교섭이 개시되면 노조는 임금·수당 같은 의제도 테이블에 올리려 할 것”이라며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사용자가 아닌 의제에 대해서는 노동위원회가 아니라고 명확히 결론을 내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노란봉투법이 시행된 후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에 대해 노사 간 상견례가 이뤄진 사례는 현재까지 없다. 하청 노조가 교섭을 요구하면 원청 사용자는 이를 받은 날부터 7일간 공고해야 하는데, 상당수 원청이 하청 노조의 교섭요구를 무시하며 공고하지 않고 있어서다.
또 지방노동위에서 시정 신청과 교섭단위 분리 등에 대한 판단이 이뤄지더라도 중노위 재심, 행정소송 등의 절차로 나아갈 수 있어 노사 분쟁은 당분간 평행선을 달릴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시행 초기인만큼 정부나 노동위원회의 판단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산업안전·작업환경 등 일부 의제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판단을 유보하는 방식은 법적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며 “판단이 어렵다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명확히 불인정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를 향해서도 박 교수는 “20일 내 결론을 내는 속도전보다 충분한 심리를 거치는 방향으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조법 시행령은 하청노조가 사용자성 판단을 신청하면 노동위는 20일 이내에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데, 기간을 연장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김덕호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 겸임교수는 “원·하청 고용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면서도 “교섭 구조 변화가 산업 경쟁력에 미칠 영향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시행 초기 교섭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현장의 혼란으로 오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법적 절차를 통해 교섭 질서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