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뭇 진지한 어투로 ‘나도 원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 진보에 속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일부 탈원전 정책을 추진했음을 모르지 않는 이들은,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 등 현실적 이유 앞에서 그래서 원전이 필요하다고 비장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을 결정하면서 이런 현실론의 스위치를 올렸다.
하지만 핵에너지는 기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 오어 낫싱’의 특성을 갖는다. 정치적인 측면부터 보자면 원전에 대해서는 ‘조건부’ 인정이 설 자리가 거의 없다. 원전이 필요하다는 인정은 더 많은, 그리고 무한한 핵에너지를 받아들이도록 톱니바퀴를 움직인다. 원전이 ‘얼마나’ 필요한지라는 질문은 봉쇄된다.
그래서 한국에는 건설 중인 원전을 포함해 이미 32기의 원자로가 있지만 그것이 많거나 적은 것인지, 얼마나 더 많이 필요한지를 토론하는 국회의원은 없다. 아직 설계와 실증 단계인 소형 모듈 원자로(SMR)를 실제 국가전력수급계획에 포함하고, 이 기술을 지원하는 특별법을 만들고, 사용후핵연료의 중간 저장을 허용하는 더 많은 원전을 위한 결정들이 정치권을 무사 통과했다. 대통령은 우라늄의 국내 농축과 재처리까지 수시로 말하지만, 그 의미와 적절성을 따져 묻는 국회의원도 없다.
수십년 뒤에도 원전이 있어야 할 것인지, 재생에너지와 병행 운용이 적절하거나 그 비용은 얼마인지, 원전을 줄여나가는 다른 미래를 위한 시나리오는 불가능한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국회의원들도 사라졌다.
이는 원전이 기술적으로 올 오어 낫싱, 즉 100% 출력이거나 0% 출력, 그리고 계속 투자 확대 또는 사양 산업이 되는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원전 산업계에서는 원전 ‘탄력운전’으로 재생에너지와 함께 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은 원전을 위험하게 혹사시키는 모험이며 오히려 비용을 높일 것이라고 우려한다. SMR 역시 설령 다수가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유연한 전력 시스템을 보장하기보다는 조금 작은 원전들을 늘릴 뿐이다.
얼마 전 방한한 에너지학자 벤저민 소바쿨 미 보스턴대 교수가 원전은 개방성과 투명성이 없는 비민주적 환경에서만 번성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지적한 이유도 그것이다. 소바쿨 교수는 핵에너지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비전과 내러티브’가 합리적 판단을 가로막는다고 설명한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 AI를 위해서,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탄소 감축을 위해서 핵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실제로 어떤 핵에너지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이런 목표들을 충족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목소리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 비민주적 환경이다.
이재명 정부의 원전 회귀 정책은 단지 원전 개수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논의와 정책의 스위치를 ‘온’으로, 그리고 ‘올’로 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원전은 단지 기술적 선택지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모으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민주와 진보를 중시하는 이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김현우 탈성장과 대안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