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2007년 영화 <밀양>은 용서에 관한 잔인한 이야기다. 어린 아들 준이를 유괴범에게 잃은 신애(전도연)는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기독교에 의지한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교도소로 유괴범을 찾아간다. 그런데, 유괴범은 평안한 얼굴로 말한다.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에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죄는커녕 위로까지 건넨다. “요새는 기도로 눈 뜨고 기도로 눈 감습니다. 준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합니다.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 이래 직접 만나고 보니 하나님이 역시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신애는 충격에 빠진다.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신애는 피해자인 자신의 동의 없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 정당한가 묻는다. 그리고 신에게 저항하듯 스스로를 망가뜨려간다. 종교를 통해 위로와 구원을 얻고자 했으나, 오히려 더 큰 절망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밀양>은 용서에 관한 잔인한 얘기다.
<밀양>을 떠올리게 된 것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사망 소식을 얼마 전 접하면서였다. 그는 1970~1980년대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으로 일하며 민주화 인사들에게 전기고문·물고문 등 각종 가혹 행위를 일삼고,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고 김근태 전 의원이다. 11년간 도피생활을 하고, 7년간 복역한 이근안은 출소 뒤 목사가 됐다. 이근안은 성경 3400여개 구절을 베껴썼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왜 목사가 됐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성경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란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을 받아 적으며 나 역시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이근안의 죽음, 영화 <밀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들이 종교를 ‘면죄부’ 삼아 죄사함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물론 종교가 말하는 용서의 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용서를 통해 개과천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신문 사회면이나, 각종 미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도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19년 옥살이하면서 세상을 증오한다. 출소 후 성당에서 은촛대를 훔쳤다가 경찰에 잡힌 장발장을 사제는 “내가 준 선물을 왜 다 가져가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감싼다. 장발장은 분노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산다. 용서는 분명 누군가를 구원한다.
그럼에도 기자는 용서에도 ‘리미트’가 있다고 믿는 쪽이다. 가령 용서가 성립되려면 최소한 몇가지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잘못에 대한 인정, 잘못에 상응하는 대가,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등이다. 그러나 이근안은 고문을 ‘예술’이라 했으며,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밀양> 속 유괴범은 신에게 용서받고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와 신을 면피 도구로 삼는 이들에게 용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레오 14세 교황은 최근 미사에서 “예수는 어떤 전쟁도 치르지 않았다. 전쟁을 벌이는 이들의 기도는 거부당할 것이다”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등 미 행정부 인사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이란 전쟁의 정당성을 강변하자, 종교가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이런 경고는 유효하다. 12·3 내란으로 감옥에 갇힌 윤석열은 “지금의 시기가 힘들더라도 구원의 소망을 품자”는 부활절 메시지를 냈다. 그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는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 구원은 법적 처벌이나 사회적 단죄가 선행된 뒤에야 가능하다. 아내를 지키겠다며 내란까지 저지른 전직 대통령이 피해자인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종교를 피난처 삼아 구원 운운하는 현실이 참담하다. 레오 14세가 트럼프를 꾸짖었듯 우리 교회도 윤석열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다시 질문해본다.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용서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피해자의 고통은 어디에 남는가.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