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서울역에 내걸린 K-패스 안내문. 연합뉴스
정부가 고유가 피해지원금·에너지 바우처·대중교통비 환급 등 추가경정예산에 담긴 민생 사업을 올해 상반기 안에 85% 이상 집행하기로 했다. 중동 전쟁에 따른 경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예산 집행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미국과 이란 간 종전 협상이 원만히 이뤄지지 않고 중동 상황이 길어지면 재정만으로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급망 다변화와 에너지 효율화 노력도 과제로 꼽힌다.
12일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정부는 전체 추경 예산(26조2000억원) 중 10조5000억원을 신속 집행 대상으로 분류하고, 이중 85% 이상을 상반기 내에 집행할 방침이다. 신속 집행 대상은 고유가 피해지원금·에너지 바우처·대중교통비 환급 등 민생과 직결된 사업을 비롯해 나프타 수급 안정 지원·석유비축사업 출자 등 공급망 관련 사업이다.
고유가 피해지원금과 취약계층 에너지 바우처는 4월부터 순차 지급되고 대중교통비 환급은 5월 중 이뤄진다. 문화·관광 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5월 영화·공연, 6월 숙박 할인 순으로 지원을 시작한다.
나프타 대체 수입 지원은 4월 중 지원 기업을 선정하고, 석유비축사업 비축자금은 상반기 안에 전액 출자할 계획이다. 정부는 2주 단위로 집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며 민생 안정과 경기 대응 효과를 조기에 끌어낸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일단 이번 추경이 ‘직접 충격’에 대비해 3개월, 간접 충격에 6개월 안팎의 여력을 확보한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나 문제는 앞으로다. 미국과 이란의 휴전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경제 불확실성은 다시 커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봉쇄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추경 효과도 빠르게 상쇄될 수 있다.
한국은 원유·나프타 수입의 약 3분의 2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어 해협 봉쇄는 곧 운송 지연과 운임 폭등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석유·화학 산업이 직격탄을 맞는 것은 물론, 국내 물가와 제조업 생산 비용 전반이 끌어올려지는 악순환이 불가피하다.
지정학적 위기 고조로 연초 1400원대 내외였던 원·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원화 가치 하락은 소비자의 실질 구매력을 갉아먹는 동시에, 원자재 가격 상승을 부채질해 중소 제조·수출 기업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기구와 글로벌 투자은행도 잇따라 경고음을 내고 있다. 아자이 방가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 10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이 지속할 경우 인플레이션 영향은 훨씬 커져 최대 0.9%포인트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골드만삭스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한 달 더 이어지면 올해 말까지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주요국들은 전쟁 장기화에 대비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중동발 황산 수급 차질에 대응해 5월부터 황산 수출을 전면 중단할 방침이다. 황산은 비료 생산의 핵심 원료인 만큼, 국제 식품 가격 상승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프랑스는 단기 연료 보조금을 삭감하는 대신 전기차 지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독일은 에너지 기업에 대한 횡재세 부과와 유류세 감세 방안을 동시에 논의 중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의 재정 집행도 중요하지만 기업들의 공급망 다변화와 에너지 효율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쟁 상황이 길어질 것에 대비해 ‘경제 맷집’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책 연구원 한 관계자는 “유가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단기간 돌아가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에너지 전환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체질 개선책을 검토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