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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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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개들이 품질검사를 하는 공장

입력 2026.04.15 19:54

경향신문은 2008년 <비정규직 800만 시대>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광범위하게 퍼진 비정규직 고용 실태를 담고 해법을 모색한 기사였다. 기사는 “비정규직 시대다. 고용 불안과 사회적 차별, 저임금의 3중고에 신음하는 그들은 사회의 다수파”라며 “지난 3월 기준 비정규직 숫자는 858만명. 여기에 지난해 평균 가구원수(2.87명)를 대입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이 ‘비정규직 생활권’에 있다”고 했다. 제조업체 임원 비서실에서 일한다는 비정규직 6년차 청년은 “사회 전체가 비정규직 바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2020년, 경향신문은 <녹아내리는 노동>이라는 기획시리즈를 내보냈다. 급속히 확산한 배달라이더 등 ‘비정형 노동’ 문제를 심층 진단한 기사였다. 기사는 “이 땅에서 ‘비정규직’이라는 표현이 광범위하게 쓰인 지 20여년. 정부가 신규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주력하는 사이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에도 담기 어려운 ‘비정형 노동’이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나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에는 이런 노동을 하려는 산업예비군들이 수도꼭지를 틀면 쏟아지는 물처럼 꽉 차서 대기 중”이라고 했다.

얼마 전부터 경향신문은 <딸깍, 노동>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일자리 문제를 다룬 기사다. 1회차 기사에서 현대자동차의 한 하청노동자는 “차가 다 만들어졌을 때 품질검사하는 걸 ‘오케이’라 하거든요. 신공장은 로봇개 두 마리가 다니면서 오케이를 한대요”라고 말한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의 한 노동자는 “AI 로봇 들인다면서요? 걔들은 밥 안 먹잖아요. 스쿠터 행렬도 사라지겠죠”라고 했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기사 전반에 짙게 깔려 있다.

지난 십수년간 한국은 ‘사회 전체가 비정규직 바다’에서 ‘플랫폼노동을 하려는 이들이 꽉 차서 대기 중인 사회’로, 다시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사회’로 숨가쁘게 바뀌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 위에 플랫폼 노동이 얹히고, 그 위에 다시 AI 노동이 더해져 겹겹이 문제를 쌓아가는 중층구조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의 한숨, 노동의 시민권조차 갖지 못한 플랫폼 노동자의 눈물, AI 때문에 일자리 자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포개졌다. 불안정 고용·고용 밖 노동·노동의 종말이 동시 병존하는 셈이다.

고용불안은 노동의 연약한 지반부터 침식한다. 급여 수준이 높고 고용도 안정적인 대기업·정규직이 플랫폼 노동에 뛰어들 이유는 없다.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가 플랫폼 노동으로 전직할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들이 경기변동에 따라 탄력적으로 인력을 늘였다, 줄였다 하려고 쓰는 비정규직·사내하청은 해고예비군이다. AI가 일자리를 대체한다면 이들부터 잘려나갈 것이다.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 등 비정형 노동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대기업 정규직은 앞으로 한 10년, 길게는 한 세대 동안 일자리를 지킬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자녀 세대는 안정적 일자리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

과학기술 발전은 양날의 칼이다. 활용하기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AI 노동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지금보다 적고 안전한 노동으로 윤택한 삶을 누리게 할 수도,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정규직 노동에서 비정규직 노동으로, 비정규직 노동에서 플랫폼 노동으로 넘어갈 때 그랬듯이, 사회가 기업의 고용부담 축소와 이윤 극대화로만 내달린다면 재앙적 결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고용형태에 대한 규제는 언제나 사후적이었다. 법·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기업들이 이미 조성한 나쁜 고용 생태계를 뒤늦게 손질하려다 보니 현실론을 핑계로 근본적인 건 도외시하고 곁가지만 땜질하기 일쑤였다. 그런 정책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할 리도 없다. 비정규직 사용 사유를 제한하지 않고 사용 기간만 2년으로 묶은 게 한 예다.

AI 노동 문제만은 그렇게 사후약방문식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산업 전반에 확산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분명한 사회적 기준을 정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방향은 기업 이윤만을 위한 AI가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AI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극단적 양극화로 사회가 깨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각자도생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든 지옥도를 매일 보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동물의 왕국으로 추락한 것도 결국 ‘노동의 실패’ 탓이 크다고 본다.

정제혁 논설위원

정제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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