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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비닐의 무게, 친환경의 무게

입력 2026.04.16 19:48

수정 2026.04.16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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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을 다 겪는다. 내란도 모자라서 책에서 배웠던 ‘오일쇼크’를 목도하자 역사를 관통하는 느낌마저 든다.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을 잃고 절규하는 중동 시민들과 생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이 있는데 석유파동이니 어쩌니 왈가왈부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래도 석유는 힘이 세다. 농업이야말로 석유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며 친환경 농업마저도 석유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유기농법은 유기합성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지만 무농약농법은 합성농약은 쓰지 않되 화학비료는 권장량 3분의 1 이내로 쓴다. 여기에 멀칭비닐과 포장재, 모종포트, 비닐하우스 피복필름까지 친환경 농업도 비닐과 플라스틱에서 헤어날 수 없다.

한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온실재배를 많이 하는 나라로 비닐하우스 겨울 난방이 농사의 성패를 가른다. 겨울에 비닐하우스 온도가 조금만 내려가도 작물 생장에 이상이 생겨 상품성이 떨어진다. 특히 요즘 재배가 늘고 있는 바나나와 망고 같은 아열대작물은 겨울 난방이 필수다. 친환경 농업이라 해도 물로 트랙터를 굴릴 수는 없으니 결국 석유에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는 같다.

비닐하우스용 폴리에틸렌(PE) 필름이나 초산비닐(EVA) 필름의 내구연한은 1~2년 정도로 짧다. 내구성이 강화된 고기능성 폴리올레핀(PO) 농업용 필름은 4년 이상 쓸 수 있지만 값이 비싸다. 비닐이 너무 낡으면 시설재배 농가의 주요 소득원인 겨울농사는 접어야 한다. 무엇보다 농민들은 비료값 상승이 가장 불안하다. 무농약이어도 비료는 써야 하고, 수경재배에서 쓰는 양액도 일종의 물비료다. 게다가 불경기에 지갑은 친환경 농산물 소비에 가장 먼저 닫히므로 이중, 삼중고다.

석유에 휘둘리는 영농구조를 전환하는 것은 단기간에 어렵다. 그렇다면 ‘친환경’ 이름에 걸맞게 물류와 소비 부문의 전환이라도 해야 한다. ‘공기 반 과자 반’이라며 질소충전 포장을 놀려댔지만 친환경 먹거리 물류도 비닐과 플라스틱에 휘둘린다. 2023년 환경정의가 주최한 ‘농산물의 일회용 포장 감축 개선방안을 위한 토론회’ 자료를 보면 재래시장, 생협 매장, 대형마트를 비교했을 때, 비닐 소포장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외려 생협이었고 재래시장이 무포장 비율이 높았다.

마트든 생협이든 무포장 벌크 형태로 진열하고 소비자들이 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개별 포장이 아니면 신선채소는 선도가 떨어져 감모가 되고, 매장이 좁고 소포장 인력이 없어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다. 그러나 만성적인 인력난은 농촌이 더욱 심각하다. 수확보다 선별과 포장에 더 매달려야 하고, 친환경 농민이라는 자부심 뒤에 비닐과 플라스틱을 쌓아놓고 써야 하니 떳떳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소비지가 생산지와 가깝다면 박스로 유통해도 선도가 지켜진다. 그러나 중앙으로 모았다가 다시 배치하는 지금의 연합물류 방식은 지체된 시간만큼 선도가 떨어져 비닐 소포장을 피하지 못한다. 진주의 로컬푸드 ‘진주텃밭’ 매장의 경우 생산자, 소비자, 실무자들의 노력 끝에 무포장 진열을 해왔는데 지근거리 유통도 한몫했다. 그렇다면 감자나 양파와 같이 덜 무르는 채소만이라도 무포장 진열을 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소비자들이 크고 좋은 것만 골라 담아 ‘못난이’만 남게 돼 재고관리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한다. 소비자들을 교육시키고 설득할 방법에 골몰하기보다 위험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온 것이다. 친환경 포장재 개발과 짧은 유통망을 구축하는 일은 정부의 지원과 계도 없이는 달성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친환경 농업의 숨통을 죄는 비닐을 걷어버리는 일을 ‘현실’의 이름에 가둬두고 테이프 땜질만 할 수는 없다. 친환경, 그 이름값의 무게가 비닐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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