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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찐 줄 알았던 아이, 호르몬·면역계가 무너지고 있다

2026.04.18 21:00 입력 김수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호매실연세이비인후과 원장

초등학교 4학년 민준이(가명)는 또래 사이에서 ‘건장한 아이’로 통했다. 큰 키에 좋은 체격, 무엇이든 잘 먹는 모습에 할머니는 “요즘 애들은 이 정도는 먹어야 한다”며 손주를 기꺼이 챙겼고, 부모 역시 “어릴 때 살은 다 키로 간다”는 세간의 격언을 믿고 안심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체중계의 숫자에 안도하는 사이, 민준이의 몸 안에서는 지방조직과 호르몬, 그리고 면역 체계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지방을 남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창고’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의학적 관점에서 지방조직은 엄연한 내분비 기관이자 면역 기관이다. 비만 상태가 되면 체내에서는 염증성 물질인 ‘렙틴’이 과도하게 분비되는 반면, 염증을 억제하는 ‘아디포넥틴’은 급격히 줄어든다.

‘염증 물질’을 내뿜는 지방조직

이러한 불균형은 몸 전체를 만성적인 염증 상태로 몰아넣는다. 특히 이 염증 신호는 뇌의 시상하부-뇌하수체-생식선(HPG) 축을 자극한다. 사춘기를 억제해야 할 ‘생물학적 브레이크’가 지방세포가 뿜어내는 염증 탓에 느슨해지는 것이다. 결국 소아비만은 단순히 “살이 조금 찐 상태”가 아니라, 호르몬과 성장 시스템 전반을 교란하는 전신 질환인 셈이다.

앞서가는 성장판, 그 뒤에 숨은 ‘성조숙증’

민준이가 5학년이 되자 몸의 변화는 가속화됐다. 겨드랑이 땀 분비가 늘고 여드름이 생겼다. 친구들은 “벌써 중학생 같다”고 했지만, 성장클리닉의 진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민준이의 골연령(뼈 나이)은 실제 나이보다 2년 이상 앞서 있었고, 이미 성선자극호르몬 수치가 치솟은 상태였다.

렙틴과 인슐린, 그리고 인슐린 유사성장인자(IGF-1)가 과도해지면 사춘기를 유도하는 GnRH(성선자극호르몬 분비호르몬)의 박동성이 일찍 활성화된다. 겉으로는 키가 잘 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성장판이 남들보다 훨씬 일찍 닫힐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비만이 성장의 기회가 아닌, 성장의 조기 종료를 재촉하는 독이 된 격이다.

비만과 알레르기, 같은 뿌리에서 자라는 병

주목해야 할 점은 비만이 성조숙증뿐만 아니라 알레르기 질환과도 궤를 같이한다는 점이다. 비만으로 인한 염증 반응은 우리 몸의 면역 체계를 흔들어 Th2·Th17 면역 반응을 강화한다. 이는 천식이나 알레르기 비염에 취약한 체질을 만든다.

실제로 유치원 때부터 가벼운 비염을 앓던 민준이는 비만이 심해지며 호흡기 증상까지 악화됐다. 밤마다 기침에 시달리고 응급실을 찾는 일도 잦아졌다. 비만 아동은 폐 기능 자체가 감소할 뿐 아니라, 치료를 위한 스테로이드제에 대한 반응조차 무뎌진다는 연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초가공식품과 수면의 악순환을 끊어야

민준이의 일상은 소아비만의 전형적인 환경을 보여준다. 시리얼과 당 음료로 시작하는 아침, 배달 음식과 탄산음료로 이어지는 저녁 식단은 식이섬유가 실종된 ‘초가공식품’의 향연이었다. 여기에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스마트폰 사용과 수면 부족은 식욕 조절 호르몬을 더욱 교란해 폭식을 부르는 악순환을 완성했다.

다행히 민준이는 1년간의 집중 관리를 통해 체지방률을 낮추고 알레르기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었다. 비록 이미 앞서가기 시작한 성장판의 시간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더 빠른 악화를 막고 호흡기 건강을 되찾은 것은 큰 성과다.

소아비만은 이제 단독 질환이 아니라 성조숙증과 알레르기를 동반한 ‘복합 만성질환’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부모들이 “살이 키로 간다”는 과거의 관성에 젖어 있는 동안, 우리 아이의 호르몬과 면역계는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이의 체중계 숫자가 아닌, 그 안의 ‘보이지 않는 계통’에 주목해야 할 때다.

김수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 호매실연세이비인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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