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관에 용역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보고서를 담은 CD 세 장을 납품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계약서를 다시 보니 ‘용역 결과물 CD 세 장 제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USB에 담아서 제출할 수 있는지 통사정을 해보았다. 계약서에 ‘CD 세 장 제출’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곤란하다면서도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USB 세 개 제출로 갈음하시죠.”
굳이 세 개가 필요한가 묻고 싶었지만, 괜히 말 꺼냈다가 마음이 바뀔까봐 그대로 납품했다. 불과 5년 전 일이다. 우리는 종종 일본 공공기관이 아직도 팩스를 쓴다고 비웃는다. 그러나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중요한 것은 기계가 읽을 수 있는 정보, 즉 머신리더블 데이터다. 하지만 공공문서는 여전히 예전 관행대로 ‘군대 차트’처럼 만드는 일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셀병합이다. 공무원은 셀을 병합하느라 날을 새우고, 분석하는 사람은 그 병합을 풀어내느라 밤을 새운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셀병합을 줄이겠다고 한 것은 긍정적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하나의 셀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야 한다. 수치와 설명, 증감률을 한 셀에 함께 넣으면 안 된다. 별도의 셀에 담아야 한다. 이러한 개혁은 AI만을 위한 조치가 아니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사람도 좋다. 장애인이 쉽게 접근하는(BF) 조치가 노약자는 물론 비장애인 모두를 편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국회에 제출하는 공식 예산서 형식을 바꾸기를 제안한다. 현재 정부가 국회에 제출하는 공식 예산서를 보는 사람은 사실상 거의 아무도 없다. 이는 AI가 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숙련된 인간 전문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일련번호와 사업명, 그리고 예산액이 하나의 셀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하나의 셀처럼 보이는 셀 안에 많은 병합된 숨겨진 선이 존재한다. 예쁜 표를 만들기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만든 표가 특별히 예쁘지도 않다.
물론, 정부는 국회에 제출하는 공식 예산서와 별개로 기획예산처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열린재정)에서 API 형태의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즉, 분석 가능한 데이터는 따로 만들고, 공식 예산서는 또 따로 만드는 셈이다. 왜 같은 작업을 두 번 하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공식 예산서 형식을 AI와 사람이 모두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분석 가능한 데이터 형식으로 통일하자.
이왕 통일하는 김에 더 근본적인 통일을 해보자. 현재 우리나라 재정의 기본 기준인 총지출, 총수입, 통합재정수지, 관리재정수지 등은 모두 우리나라 재정당국이 만든 국내용 기준이다. 기획예산처는 국내용 기준과 별도로 국제기준에 따라 작성한 통계지표를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 제출한다. 그러니 두 번 일하지 말고 국제기준으로 분석 가능한 상세한 자료를 하나만 만들자. 이 자료로 국제용, 국내 공식용, 국내 비공식용으로 통일하자.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가장 좋다.
지금은 국제기준으로 만든 국제용, 보기 불편한 국내용 공식 자료, 보기 편한 국내용 비공식 자료를 각각 만들고 있다. 비효율일 뿐만 아니라 수치가 뒤섞인다.
이러한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관된 기준에 따른 정보 생산이다. 최근 고유가 대응을 위한 추경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재명 정부 들어서 두 번째 추경이다. 정부는 지난해 30조5000억원, 올해 26조2000억원 규모의 추경을 편성했다. 재정 지출이 과도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추경 규모가 실제 증가한 총지출 규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년 30조5000억원의 ‘추경 규모’에 따른 총지출 규모는 14조9000억원에 불과하다. 올해 ‘추경 규모’는 26조2000억원이지만 증가한 총지출액은 25조2000억원이다.
정부는 추경 규모를 발표하면서 일관성 없는 추경 규모를 정한다. 어떤 때는 국채상환 규모를 포함하기도, 빼기도 한다. 어떤 때는 순증액을, 또는 총증액을 내세우기도 한다. 이처럼 정부가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규모를 임의로 발표하니 AI는 물론 국민도 실제 증가하는 재정 규모를 알 수가 없다. 추경 규모는 그냥 총지출 증가액으로 통일하자. 만약 기준을 바꾼다면 과거 수치도 소급 적용해 연도 간 비교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그 기준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숫자를 발표하지만 기준은 숨긴다. 그래서 우리는 숫자를 보고도 현실을 알 수 없다. 같은 숫자가 다른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정치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