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경제에 기여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세대가 이루어놓은 발전을 너무 폄훼하는 것은 아닙니까?” 기다렸다는 듯 그는 신념 어리게 꽉 잡은 마이크를 통해 나에게 항의하듯 질문했다. ‘대기업의 외재적 비용 전가와 한국 발전주의 복지국가의 재해석’에 대한 논문 발표를 막 마친 때였다. 악의는 없었지만, 분석 결과에 대한 논의에서 한참 멀어진 그의 격앙된 목소리가 난감했다.
빠른 산업화를 경험한 세대의 특징일까. 아닌 듯하다. 몇해 전 다른 강연장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날아왔다. “삼성 이재용이나 구속시키다니, 정부는 대기업이나 때리고 청년들 일자리는 포기한 것인가요?” 정치 활동에 관심 있어 모인 청년들이었다. 나는 그날도 하청노동자와 비정규직 청년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따지듯 날아온 그 문장 앞에서, 나는 적확한 말을 찾지 못했다.
두 질문의 배경을 이해하면서도, 짧은 시간 안에 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지혜가 사실 부족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반문해야 했다. 대기업이 한국을 먹여 살리고, 정부의 기업 지원이 일자리를 만들고 우리 모두의 삶을 나아지게 한다는 믿음. 그 단단한 믿음의 이면은 무엇인가. 대기업의 성장이 정말로 ‘모두’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까.
한국의 고도성장은 흔히 ‘압축성장’이라 불린다. 그 말 속에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형성된 구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부 노동자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된 보호와, 그 바깥 집단에는 비용을 전가하는 구조가 드러난다. 정부는 특정 대기업집단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며 수출의 핵심 기지로 활용했고, 대기업 정규직에게는 처음에는 기업복지라는 독자적 보상체계가, 이후에는 정규직 중심의 사회보장체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은 안전망 바깥에 놓였다. 대기업의 수출경쟁력을 유지하며 고용 불안정과 사회보장 비용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에게 떠넘긴 분업체계다. 하청, 파견,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노동비용을 절감하고, 납품단가 인하 압력을 통해 중소기업에 비용을 전가하며, 비정규직이라는 두꺼운 완충지대를 쌓아 올렸다. 성장의 과실은 안쪽으로 흘렀고, 비용은 바깥쪽에 떠넘겨졌다. 이중노동시장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한국의 이중노동시장은 인공지능(AI) 시대에 더 큰 과제를 앞두고 있다. 지금 한국 정부는 전력을 다해 AI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6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AI 분야에 배정된 예산은 약 10조원으로, 전년도 본예산의 3배가 넘는 역대 최대 규모다.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이 예산안을 “AI 시대를 여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예산”이라 불렀다. 기술 혁신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지원의 구조가, 과거 특정 기업집단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던 풍경과 많이 닮아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재벌을 수출의 핵심 기지로 키우는 동안 하청 구조의 저임금을 방치하고 복지를 유예했듯이, AI 산업 지원 역시 익숙한 구조를 반복한다. 물론 일부 예산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도 배정돼 있다. 그러나 2조원이 넘는 GPU 인프라가 소수의 대형 클라우드 기업을 거쳐 구축되고, AI 가치사슬 상층부를 대기업이 점유하는 상황에서, 투자의 과실이 누구에게 귀착되는지는 다른 문제다.
산업화 시대 대기업들이 하청과 파견을 통해 비용을 외부화했다면, 플랫폼 시대 기업들은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관리를 통해 더욱 광범위하게 비용의 외부화를 실현한다. 수만명의 배달 라이더와 플랫폼 노동자를 심지어 ‘고객’이라 부르며 고용비용을 덜어내고 있다. AI 학습을 위해 데이터 라벨링을 하는 노동자들, 알고리즘 아래 일감을 기다리며 접속 중인 프리랜서들, AI 도입으로 일자리가 허물어지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울타리 바깥쪽에 서 있다. 비용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구조가 AI라는 새 언어를 입고 반복된다. 정부는 AI 대응 일자리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AI 산업 투자 속도에 비해 이들의 고용 안정과 사회보장을 위한 제도 설계는 아직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반세기 넘게, ‘대기업이 잘되면 모두가 잘된다’는 믿음이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다. 그러나 그사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고착화됐고, 비정규직 비율은 줄지 않았다. 변화하는 일의 방식과 함께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는 새로운 형태로 끊임없이 확장되어왔다. AI 시대에도 비용의 외부 전가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더 은밀하고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