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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이이제이(以夷制夷)

입력 2026.04.22 20:01

수정 2026.04.2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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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이이제이(以夷制夷)

범 잡는 담비란 속담이 있다. 호랑이는 먼발치로나마 본 적이 있지만 담비는 족제비 비슷한 동물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잠시 찾아보니 놀랍게도 담비는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라고 한다. 백두대간 험산 준령을 쩌렁쩌렁 호령하는 호랑이도 없고 마침 늑구도 잡혀 제집으로 돌아간 터에 콧날 매끈하고 몸집 자그마한 동물이 고라니의 개체 수를 조절한다니 담비의 사냥법이 자못 궁금하다. 방송국 제작진이 사냥하는 모습을 화면에 담으려 했지만 담비의 발자국을 번번이 놓치는 통에 실패한 듯 보인다. 범접할 수 없는 나무타기 실력에 종횡무진 숲을 뛰어다니는 날렵하고 작은 유선형 몸을 카메라가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꿩의 뼈와 깃털이 발견된 곳에 남긴 발자국을 보고 서너 마리의 담비가 협동 작업을 했으리라 추측하고, 사냥감 상흔을 분석해 목 뒤에서 눈과 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리라 담비의 사냥 기예를 평가한다. 이렇게 어울려 약점을 급습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지금도 어둠 속에서 멧돼지를 노린다.

미시생물계에도 담비 같은 존재가 있다. 육지에도 바다에도 세균은 그득하다. 먹을 것이 넘치고 경쟁자마저 없을 때 무한 증식하는 이런 세균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것이 바로 파지이다. 그런 점에서 파지(phage)는 능히 담비 역을 맡을 만하다. 파지의 정확한 이름은 박테리오파지다. 박테리아를 먹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소속은 바이러스다. 폐 상기도 세포의 여러 기제를 빌려 증식하는 코로나19도 바이러스이다. 무엇보다 파지는 그 압도적인 숫자로 다른 바이러스를 능가한다. 세균이 있는 곳에는 무조건 파지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세균을 키우다 파지를 발견한 일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에서 공부했지만 남미 여러 나라를 오가며 연구하던 펠릭스 드에렐이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 정착한 해는 1909년이다. 이곳에서 장염을 일으키는 세균을 연구하던 드에렐은 배양액에서 세균이 파괴된 투명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추출한 여과액을 이질균과 섞자 아주 빠르게 세균이 시험관 안에서 죽어버렸다. 나중에 드에렐은 이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박테리오파지라고 이름하고 이를 세균 감염 치료에 쓰고자 애를 썼다. 이질을 비롯한 몇가지 감염 치료에 파지를 쓰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의 앞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드에렐이 학계 변방의 무명씨로 살았던 것도 한가지 이유겠지만 마침 그 당시에 페니실린이 등장한 사건이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페니실린 가루는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파지는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정체 흐릿한 파지는 효능조차도 썩 신통치 않았다. 아마 주사로 몸에 투입했을 때 파지 단백질에 맞서 환자가 항체를 만들어낸 것이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파지가 고전하는 틈에 페니실린은 전광석화처럼 세균을 제압했다. 악재가 겹치면서 파지는 동유럽 그루지야의 파지연구소를 빼고는 관심을 두는 곳이 없을 만큼 역사의 무대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동안 항생제가 세균과의 전쟁에 나서 수많은 백병전을 치렀다. 그러자 내성을 띤 세균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유전자 편집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라는 놀라운 수단도 화려하게 등장했다. 사실 크리스퍼는 파지에 맞선 세균의 방어체계다. 하지만 파지는 오늘도 어김없이 세균 무리의 크기를 일정하게 조절한다. 특정한 세균의 급소를 노리는 특정한 파지가 눈을 부릅뜨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몸 안에는 대장에 세균이 가장 많다. 세균이 있으니 파지가 없을 리 없다. 건강한 사람의 똥을 걸러 다른 이에게 세균을 이식하면 파지도 덩달아 따라온다. 지금까지 임상에서 가장 뚜렷한 효과를 보인 분변미생물이식(fecal microbiota transplantation)법은 재발성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 치료에 주로 쓰였다. 이 질환은 항생제를 복용한 환자의 장 안에서 유익균이 줄면서 생기는 세균성 대장염으로, 심한 설사와 복통을 유발한다. 몇 종류의 항생제를 교차해 치료하는 방법이 쓰이지만 자주 재발하는 이 증상 열에 아홉은 장내 세균을 이식하는 순간 빠르게 회복됐다. 아일랜드 연구팀은 이 과정에서 파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논문을 셀 계열 잡지에 발표했다. 건강한 사람의 장에서 유래한 파지가 환자의 대장 환경을 치유한다는 결과였다. 선택성 높은 파지의 특성을 맞춤형 이이제이 치료로 연결하려는 과학계는 밤낮없이 바쁘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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