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교진 교육부 장관이 지난해 12월12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은옥 교육부 차관, 최교진 교육부 장관, 차정인 국가교육위원장. 연합뉴스
교육 담당 기자가 자주 접하는 표현 중 하나는 ‘진보 교육계’입니다. 단체명이나 각종 활동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교육계 인사들이 발표한 기자회견문이나 입장문을 보면 교육의 다양성, 경쟁 완화, 민주시민교육, 교육격차 해소 등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진보 교육계는 숙의와 합의, 대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만큼 내부 토론도 치열합니다. 지난해 하반기 교육부 장관 임명 직전에는 700여명의 진보 교육계 인사가 참여한 한 SNS 대화방에서 사실상의 ‘자체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내신 절대평가 전환, 고교학점제, 인공지능(AI) 교육 등을 두고 질문이 이어졌고, 장관 후보군으로 거론된 인사들이 답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장관 후보군이었던 차정인 국가교육위원장과 박백범 전 교육부 차관은 일부 질문에 답변하거나 의견 표명을 유보했습니다. 당시 최교진 교육부 장관도 해당 대화방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논쟁이 담고 있는 선의와는 별개로, 진보적 가치가 반영된 교육 정책이 실제 현장에 안착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의를 담은 정책이 현장에서 작동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서울시교육청 신청사에서 열린 개청식에서 정근식 서울시교육감과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권도현 기자
고교학점제는 이러한 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지난해 고등학교 1학년부터 도입된 이 제도는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이 확정됐습니다. 고교학점제에선 학생들이 직접 과목을 선택해 대학처럼 수업을 듣게 됩니다. 진보 교육계가 강조하는 학생 중심 교육과 다양성·자율성 확대라는 가치가 반영된 제도입니다.
그러나 시행 과정에서는 지역 간 격차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학생 수가 적은 비수도권 소규모 학교에서는 다양한 과목 개설이 불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일부 학생들은 택시를 타고 수십km 떨어진 다른 학교로 이동해 수업을 듣거나, 온라인 학교를 이용해 선택과목을 듣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교육격차 해소를 지향한 정책이 오히려 격차를 벌어지게 만드는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교학점제 도입 이후 도심에서도 학생 수가 많은 학교를 택하려는 학부모들의 움직임이 더 선명해지는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일각에서는 “고교학점제는 경기 판교나 서울 목동 같은 중산층 밀집지역에서나 가능한 제도”라는 지적까지 나옵니다.
또 다른 예는 고교 내신의 절대평가 전환입니다. 최교진 장관은 공론화를 전제로 고교 내신의 절대평가 전환에 찬성하는 입장을 줄곧 밝혔습니다.
상대평가인 고교 내신은 학생들 사이 경쟁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지목됩니다. 순위 다툼 속에 과도한 경쟁이 일어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절대평가 전환이 실제로 경쟁 완화나 사교육 감소로 이어질지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대학 입시 경쟁이 지금 수준으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내신만 절대평가로 전환될 경우, 평가 기준의 학교 간 차이로 인해 대학에선 내신점수의 신뢰가 낮다고 판단해 반영 비중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진보 교육계에서 오래도록 경계해온 대학 본고사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평가 요소가 늘어나고 제도가 바뀔수록 유리한 것은 부모의 경제적 지원 능력이 있는 성적 중상위권 이상의 학생입니다. 새로운 제도에 경제력을 기반으로 빨리 적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정중심 평가를 강화한다는 선의에서 도입된 수행평가가 학생들의 짐이 됐고, 수행평가 사교육도 성행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지난해 12월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새천년홀에서 종로학원 주최로 열린 ‘2026 정시 합격 가능선 예측 및 지원전략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학부모 및 수험생이 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내신 절대평가화와 함께 제시된 의제인 AI 채점 기반의 수능 서·논술형 도입 논의 또한 비슷한 맥락에 있습니다. 이 논의는 학생의 사고력을 오지선다 객관식이 아닌 글쓰기로 평가하겠다는 기획에서 출발했는데, 채점에 드는 행정 부담을 덜기 위해 AI를 도입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AI의 신뢰성은 아직 담보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기술에 의존해 손쉽게 이상을 구현해보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같은 정책과 가치의 괴리는 중앙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진보’ 진영의 서울시교육감 단일 후보로 선출된 정근식 현 서울시교육감이 이끄는 서울시교육청도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서울 강남구 대청초등학교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대청초는 폐교 위기에 놓여 있지만, 인근 영희초와 일원초는 각각 260명, 1389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통학구역 조정을 통해 학생을 분산 배치할 수 있었지만, 교육청은 민원 부담을 이유로 이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일원초는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인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곳입니다.
차정인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왼쪽)이 올해 1월20일 국회도서관에서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의원실과 출신학교채용차별방지법 국민운동이 연 ‘출신학교·학력 채용 차별 방지법 국민대회’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차 위원장,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정근식 서울시교육감, 최교진 교육부 장관. 연합뉴스
학부모들의 폐교 반대에 부딪힌 서울시교육청은 올해 신입생부터 대청초-영희초를 선택해 진학할 수 있게 하면서 사실상 대청초를 고사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다양한 학생이 섞여 수업을 듣고 생활하게 한다는 진보 교육계의 가치는 논의에서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전국연합학력평가 응시 자격을 학교밖 청소년에게 주지 않아 행정소송과 헌법소원까지 이어진 최근 사례도 진보 교육의 가치가 무엇인지 되새겨보게 하는 사건입니다. 서울시교육청은 대형로펌을 선임해 법적 대응을 했지만 패소했습니다. 법원이 학교밖 청소년의 학력평가 응시자격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제도 바깥의 학생에게도 관심을 쏟는 진보 교육계의 경향과는 정반대의 흐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교육계가 교육으로 사회 난제를 해결하겠다는 큰 꿈을 품었다면 선의가 결과로 이어지는 정책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최교진 장관은 지난해 12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교육은 믿음과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생했다”는 답변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지금 진보 교육계에 필요한 것은 ‘믿음과 기다림’이 아니라 선의와 이상을 정책으로 구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