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여 전, 연세대 캠퍼스의 고즈넉한 담장과 넝쿨로 덮인 건물 옆에 나무 덱으로 만든 휴식 공간이 들어섰다. 그런데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장애 학생들은 계단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학교는 뒤늦게 새 시설 일부를 뜯어 긴 경사로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장애인을 고려했다면 다시 공사할 필요도 없었고 비용도 훨씬 적게 들었을 것이다. 그 후 대학은 학내 모든 건물의 신축, 증개축 설계 과정에 장애학생지원센터의 의견을 듣도록 했다.
덱 문제는 한 번의 재공사로 해결됐다. 그러나 해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곳이 있다. 점자교과서다. 비장애 학생들은 2월 말이면 새 교과서를 받지만, 통합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의 시각장애 학생은 3월이 지나서야 전 과목 교과서를 받아든다. 교육부가 2월 초 검인정과 최종 점검을 마치면 교과서 출판사가 인쇄에 들어가고, 그때서야 점자교과서 제작사는 파일을 넘겨받는다. 초중고 교과서는 모두 합치면 약 2000종에 이른다. 학교와 과목별로 사용하는 교과서가 다른 탓에, 시각장애 학생의 요청에 맞추기 위해 점역사들은 매년 2월과 3월 밤샘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1983년 한 시각장애 고등학생을 알게 된 이후, 교과서가 늦게 보급되는 현실을 지켜봐왔다. 여러 차례 발표와 기고를 이어왔지만, 특히 2015년 국회의장 주관 입법간담회가 떠오른다. 당시 한 어머니가 마이크를 잡고 “아이가 공부하고 싶어도 책이 없다”며 울먹였다. 차별 시정을 위한 소송 등 개별적 노력도 이어졌지만,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 동력은 지속되기 어렵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점자교과서에 교과서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점자교과서도 일반 교과서와 함께 검인정 절차에서 고려되어, 앞선 덱 사례처럼 뒤늦게 손보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 이후의 과제는 검인정을 통과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출판사들의 몫이다.
마침 지난해 8월 초중등교육법이 개정돼 교과서가 법률에 규정됐다. 그런데 여기에 점자교과서가 빠져 있었다. 근본적 해결을 위해 드디어 그해 11월, 17명의 시각장애 학생과 부모, 교사가 입법부작위 위헌확인 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소원이 제기될 무렵, 1년 넘게 국회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돼 있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2026년 1월 이후 갑자기 해당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까지 불과 3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통과됐다. 형식은 의원입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육부가 주도한 입법이었다. 왜 갑자기 속도를 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를 진정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남는다.
실제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개정법은 점자책을 학기 전 적시 제작 보급해야 한다는 조항을 두었지만, 위반 시 제재 조항이 없다. 더욱이 교육부가 ‘출판사 제공 디지털 파일 기준 마련’ ‘디지털 파일 검인정 절차 운영’ ‘점자교과서 신청 절차 체계화’와 같은 기반을 마련하지 않은 채 ‘학기 전 보급 완료’라는 목표만을 설정해 놓았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출판사와 제작사에 더 서둘러달라고 재촉하는 셈이다. 오죽하면 당사자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알맹이 없는 법안이라고 반대했겠는가.
교육부는 언제까지 미봉책으로 이 문제의 본질을 외면할 것인가. 그런데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와 함께 인터뷰에 나서며, 복수의 지상파 방송 메인뉴스에까지 보도됐다. 무엇이 소장에 자녀의 이름을 올리고 TV 뉴스에 얼굴을 드러내도록 용기를 내게 했을까?
점진적으로 하면 된다고? 자녀가 교과서 없이 학기를 시작하고, 내신에 들어가는 중간고사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매년 반복되는데도,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다독거릴 텐가? 어떤 학부모는 집에서 직접 점자 타이핑을 해서 교과서를 만드는 장면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국무회의 석상 대통령 입에서 “이런 것 하나 해결 못하고 있나요”라는 말이 나와야 나설 건가? 매년 반복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렇게 복잡하지도 재정에 부담을 주지도 않는다. 그 출발은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1항 교과용 도서에 “점 자 교 과 서”, 이 다섯 글자를 넣는 데서 시작한다.
교육부는 위헌 결정을 피하려고만 애쓰지 말고, 헌법상 평등한 교육을 받아야 할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점자교과서가 실질적으로 교과서가 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포함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라.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