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스페인 말라가대학에 가서 한국어학과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문학을 소개하는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청중이 여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 조선 여인의 삶과 죽음을 인상적으로 담은 작품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한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지역과 언어, 시대를 뛰어넘어 지구 반대쪽 나라에서 한문으로 쓴 전근대의 문학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이 높지 못해 스페인어 통역을 거쳐 진행됐기에, 강연의 집중도마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첫 작품은 1705년에 김창협이 죽은 셋째 딸의 묘지에 새기기 위해 쓴 글이었다. 작가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던 딸, 책을 좋아해 식견이 뛰어났음에도 시집가서 여인으로서의 일에만 전념했던 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낼 길이 철저히 차단되어 있으니 차라리 일찍 죽어서 천하의 명문장가인 아버지의 묘지명이라도 받고 싶다고 말한다. 아버지인 자신보다 먼저 죽고 싶다는 이 기막히고 당돌한 말이 참언처럼 현실이 되어버리자, 김창협은 허망한 물음으로 글을 맺는다. “너는 이제 그 소원을 이룬 것인가?”
그때였다. 강연을 듣던 한 스페인 학생이 눈물을 흘린 것이. 한문을 현대 한국어로 옮기고 다시 스페인어 통역을 거쳐 전달된 한 구절이 400여년 전의 슬픔을 되살린 것이다. 본인과 아무 상관도 없는 어떤 이의 오래된 죽음이 그토록 깊은 공명을 만들어낸 까닭이 무엇일까?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김애란 작가는 “짧고 자극적인 쇼트폼에 익숙해져 집중하지 못하는 ‘몸’이 된” 요새 들어서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면서, “어떤 진실은, 어떤 고통은, 반드시 그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는 속도로, 말하고 싶은 분량만큼 전해져야” 하며 “거기에 특화된 장르 중 하나가 문학”이라고 답했다. 동서고금에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은 이들이 적지 않을 테지만, 특정한 작가의 속도와 분량이라는 형식에 담긴 슬픔이 그 속도와 분량에 초점을 맞춘 학생을 만나는 순간을 나는 목도했다. 다시, 문학의 가치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