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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단절의 역설적 효능

입력 2026.04.28 20:47

2020년 1월 한국은 청해부대를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했다. 아덴만에 이미 파견한 부대의 작전 해역을 호르무즈 해협으로 넓히는 방식이었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이란과의 핵 합의를 파기하고 제재를 가하면서 조성된 양국 간 긴장이 호르무즈 해협 유조선 피격·나포 사건으로 이어지자 ‘국민 보호, 선박 안전 항행’ 등을 명분으로 한 것이지만, 파병 결정에는 다른 배경이 있었다.

그 무렵 한국 정부는 ‘하노이 노딜’로 동력이 사그라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되살리기 위해 한국인들이 북한을 개별적으로 방문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북·미 협상의 교착 속에서 남북관계의 독자적 진전을 위한 해법으로 대북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개별관광 카드를 내놓은 것이다. 대북 제재와 무관하다곤 해도 미국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었다. 2020년 1월14일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방안을 제시했고, 1월20일 통일부가 이를 구체화했다. 청해부대의 호르무즈 파병안이 발표된 것은 그다음 날인 1월21일이었다. 당시 한 신문 사설이 “한·미관계와 남북관계까지 고려한 ‘다목적 포석’”이라고 했듯이 호르무즈 파병의 배경에는 남북관계가 있었다. 파병과 개별관광이 교환품목이 된 이 거래는 공교롭게도 코로나19 확산 탓에 일방적인 증여(파병)로 끝났다. 그러나 코로나 변수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이 개별관광에 동의했을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6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재명 정부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호르무즈 파병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명분 없는 이란 기습 침략에 미국의 맹방들마저 일제히 등을 돌렸으니 한국도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올라탔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미국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한국 정부가 과연 파병 요구를 뿌리칠 수 있었을까.

북한은 2023년 말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선언하고 지난 2월 당대회를 통해 이를 공식화, 제도화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북 무인기 사과를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 김여정이 긍정 평가한 것에 정부가 반색하자, 외무성 제1부상 장금철이 “멍청한 바보들의 희망 섞인 해몽”이라고 조롱했다. 남북대화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다. 이재명 정부는 남북관계가 ‘풀리면 좋고 안 돼도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굳건히 장벽을 치자, 한국은 홀가분해졌다. 남북관계 때문에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사라진 것이다. 한국은 그간 통일 혹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미국에 머리를 숙여야 했고, 국제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늘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 폐단이 사라진 것은 북한의 ‘두 국가’ 선언이 초래한 역설이다. ‘이대근 칼럼’(경향신문 4월21일자)이 표현했듯이 북한은 한국 외교를 해방시켰다. 호르무즈 파병 요청에 한국은 ‘특별한 고려’ 없이 상식과 가치에 맞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한·미관계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다.

한국 정부가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 결의안에 공동제안국으로 참여(3월30일)한 열흘 뒤 이 대통령이 SNS를 통해 이스라엘군의 인권 유린을 비판한 것도 ‘남북관계 부담’을 덜게 된 상황 변화와 무관치 않다. 그간 한국은 미국과 특수관계인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을 삼갔다. 보수 정부는 물론이고, 진보 정부 역시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에 미칠 후과 때문에 회피했던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 열망이 크면 클수록 한국의 외교적 선택은 한국이 중시해온 보편적 가치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두 국가’ 관계는 이런 비정상을 해소하는 뜻밖의 효능을 발휘하고 있다. 남북관계 단절이 외교에 플러스로 작용하는 이 일시적 현상을 구조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외교무대 뒷전에서 미국 눈치를 보며 침묵을 지키기엔 몸집이 너무 커졌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언제까지나 ‘미국의 종속변수’로 머무를 순 없다.

물론, 북한 변수의 축소로 한국이 확보하게 된 자율성은 아직 제한적인 범위일 것이다. 국내 보수세력이 미국과 합작해 이재명 정부를 옥죄려는 시도도 더욱 집요해질 것이다. 최근 한·미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은 예고편이다. 그러나 한국과의 관계를 그르치면 미국도 손해인 시대가 됐다. 이 대통령도 지적(28일 국무회의)했듯이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상식과 원칙에 따라” 의연한 태도로 임한다면 한·미관계도 건강하게 재구축될 수 있다.

서의동 논설실장

서의동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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