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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고향

입력 2026.04.29 18:13

수정 2026.04.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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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훈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1일 국회 본회의에서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설치를 위한 특별법안과 지방자치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정훈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1일 국회 본회의에서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설치를 위한 특별법안과 지방자치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석이나 설 명절,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홀로 강가에 서 있으면 내가 살고 있는 모두의 고향이 나에게는 타향 같았다”. 시인 김용택이 이용악의 시 ‘눈보라의 고향’에 담아둔 감상이다. 떠난 이들에게 고향은 그리움이다. 하지만 잠시 그 허기를 채우고 떠나고 마는 곳. 더 이상 그곳은 삶의 고향이 아니다. 고향에 뿌리 박은 이들은 떠난 그들의 허기를 채워주다 정작 자신이 허기지고 만다. 20세기 한국인 삶의 가장 큰 사건은 이 ‘도시화’가 만들어낸 허기일 것이다. 삶이 땅이 아닌 공간에 터 잡은 도시화 말이다.

고향을 물으면, 우물거리게 된다. ‘서울 외엔 모두 시골’이란 서울내기들에게 자존심 상하면서도, 긴 서울살이에 지방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서울과 지방의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는 ‘1.5세대’가 내 고향 정체성이다.

도시민 2세대지만, 기억의 지층에 시골 또한 간직한다. 폭설이 내린 아침 뒷산에 올라 ‘푸드덕’ 소리에 돌아본 시선 속으로 들어오던 눈 날리는 솔가지의 흔들림을 기억한다. 노란 나락들이 탈곡기에서 탈탈거리며 알맹이를 드러낼 때 온몸을 휘감던 까슬함도 떠오른다. 그래서 지금 고향에 대한 허기는 서울 맞은편에서 왜소해진 ‘지방’으로 향한다.

1950년 도시인구는 410만명으로 한국인 다섯 명 중 한 명(도시화율 21%)에 불과했다. 60년이 흘러 2010년 도시인구는 4060만명(82%), 이제 거꾸로 5명 중 한 명만이 시골에 산다. 사람도 물자도 서울로 떠났다. 그사이 영호남 인구는 반토막 났다. 반면 전체의 7%에 불과하던 서울 사람은 22%로 세 배 이상 불었다. 도농과 서울·지방의 격변은 천지개벽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땅의 삶에서 공간의 삶으로 변화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공동체에 ‘뿌리’를 둔 존재에서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개인’으로 변모했다. 삶들 사이엔 관계보다 기능이 중요하고, 그게 존재가치를 정한다. 전장이 된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올라갈 것인가’가 삶의 질서가 된다. 도시는 산업화·민주화의 용광로였지만, 동시 압축 진행된 근대화 속도에 정체성은 뿌리를 잃는다. ‘성공해도 불안한 도시인’들은 그래서 늘 허기진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지방’을 이야기하는 상황이 낯설면서도 반갑다. 헌법 전문에 균형발전을 새겨넣자 하고, 아예 행정수도를 못 박자는 말도 들린다. 20여년 전 어디에도 없던 관습헌법 논리로 천시받던 균형발전이 지금 이처럼 절실해졌다.

광역행정통합은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우여곡절 끝에 광주·전남은 이번 선거를 통해 특별시로 합쳐진다. 서울에 준하는 법적 지위를 지닌다. 구한말 대한제국이 ‘조선 8도’에 남북을 더한 뒤 120년 넘게 이어진 체제에 처음 균열이 생겼다. 지방을 서울·수도권에 대항할 만한 ‘5극3특’의 거대 권역으로 재편해 경쟁력을 갖추도록 한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전남광주통합시 앞길이 봄날 같지만은 않다. 원칙과 대의의 풍경을 지나면 다가오는 건 세밀화 같은 현실이다. 통합 시청을 어디에 둘지, 공무원 조직은 또 어떻게 합칠지 지나야 할 가시밭길이 한둘이 아니다. 또 다른 쏠림이 나타날 것을 알기에 처절할 수밖에 없다. 특별시는 강해지겠지만, 그 안의 시군들은 더욱 기반을 잃을 것이다. 이 명료한 미래는 지난 세기 도시화에서 한국인들이 체득한 교훈이다. 떠난 이들에게 상품으로 박제된 고향은 여전하고, 지방 소멸의 비극적 얼굴 또한 변함없이 남겨진 이들 몫이 될 것을 예감하게 된다.

서울·수도권만 비대해지는 소멸의 무한증식보단 나을 것이다. 다만 아쉽다. 이왕 바꿔야 한다면, ‘서울화의 아류’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을까. 오랜 허기 끝에 먹은 밥이 설익고 온전히 헛헛함을 채울 수 없는 것이라면 안타깝지 않은가.

문득 지난 200년을 지배해온 ‘근대성’의 지침을 바꾸지 않는 한 ‘허기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함에 다다른다. ‘5극3특’의 또 다른 불균형 전략이 ‘서울뿐인 한국’을 만든 불균형 전략의 대안이 될 수 없듯, 크고 효율적인 세상을 숭배하는 한 ‘우리의 땅’은 너무 좁다. 성장과 개발의 욕망 앞에 고향을 고향답게 만드는 꿈은 무망할 뿐인가.

성장해서 허기가 채워졌는가. 그렇지 않음을 인정하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허기진 삶을 바꿀 근대성의 재구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더 느리게, 더 소박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그 목마름과 용기 사이에서 독백 같은 자문은 내내 휘청인다.

김광호 논설위원

김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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