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기성 미디어에는 돈독이 오른 기사들이 부쩍 늘었다. “우리 집은 부자일까? 35억은 있어야 상위 1%” “60억이 600억으로, 강남 빌딩 초대박” “유튜버 상위 10% 평균 수입 3억원” 같은 제목은 이제 낯설지 않다. 이 기사들은 대체로 같은 문법을 따른다. 제목 앞쪽에 큰 금액을 배치하고, ‘상위 1%’ ‘연봉 1억 이상’ 같은 상위 집단을 내세운다. 여기에 ‘잭팟’ ‘대박’ ‘부럽다’는 표현을 덧붙여 독자의 상실감과 비교 심리를 자극한다.
그동안 이런 ‘대박’의 주인공은 대개 부동산, 주식, 코인 같은 자산소득이거나 사업 성공을 통해 얻은 비임금소득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소득을 통한 횡재를 시장논리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위험을 감수한 투자의 결실이라는 설명도 따라붙는다. 이때 운도 투자의 일부로 간주된다. 반면 고용을 통한 노동소득으로 눈을 돌리면 태도는 달라진다. 직원들에게 성과급이 돌아간다면 질문은 곧바로 “저 사람이 그만큼 받을 자격이 있나”로 바뀐다.
최근 SK하이닉스 성과급 논란은 이 이중 잣대를 잘 보여준다. 지난해 초과이익분배금이 크게 늘면서 직원들에게 막대한 성과급이 예고됐다. 생산직 직원들도 상당한 혜택을 받을 것으로 알려지자 채용 시장은 들썩였고, 반도체 전공 선호 역시 치솟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성과급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시작됐다. 일부 언론은 “하이닉스 생산직이 서울대 공대를 나와 현대차에 간 사람보다 특별히 더 노력했느냐”는 식의 커뮤니티 반응을 전하며 마치 이런 성과급이 불공정한 것처럼 말한다.
이 논쟁은 흥미롭게도 한국 사회의 공정성 감각이 어디에서 예민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에서 경영진이 수백억원의 보수를 받거나 주주들이 막대한 배당을 챙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반면 하이닉스 직원은 다르다. 그들은 같은 임금생활자의 범주 안에 있다. 나와 비슷하게 취업했고, 월급을 받고,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다. 바로 이 가까움이 박탈감과 불공정 시비를 만든다. 어쩌면 이 현상은 ‘닭장 속 서열’ 현상을 반영할지도 모른다. 닭장 안의 닭들은 서로를 쪼며 서열을 만들지만 그 경쟁이 닭장을 만든 주인을 향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좋은 성적, 명문대, 대기업·전문직·공기업, 안정적 고소득으로 이어지는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여왔다. 불평등하더라도 “공부를 잘했으니”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으니” “더 좋은 직장에 갔으니”라는 말로 차등보상을 정당화했고, 그것을 공정성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특정 산업의 슈퍼사이클이 이 질서를 흔들었다. 사회적으로 더 선망받는 학교와 직장에 갔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하이닉스 성과급 뉴스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돈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이 믿고 따라온 비교 경쟁의 질서가 실제 보상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충격 때문이다.
물론 자산소득과 노동소득은 애초에 같은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자산소득에는 투자 위험과 손실 가능성이 따르고, 노동소득은 조직 안에서의 직무, 성과, 기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질문은 남는다. 왜 자산의 초과수익은 시장의 결과로 쉽게 승인되는데, 노동의 초과보상은 곧바로 도덕적 자격 심사의 대상이 되는가. 문제는 서로 다른 보상 원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차이가 언제나 소유의 몫에는 관대하고 일의 몫에는 가혹하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소유권 중심의 공정성 관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했다”는 사실은 강력한 도덕적 정당성을 갖는다. 주식을 샀으니 기업가치 상승의 몫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반면 직원의 초과보상에 대해서는 곧바로 그 기여도를 따져 묻는다. 소유의 몫은 권리로 쉽게 정당화되고, 일의 몫은 자격을 증명해야 정당화된다. 위쪽의 소유자에게 향하는 시선은 너그러운 반면, 옆쪽의 노동자에게 향하는 질문에는 날이 서 있다. 주주의 초과수익은 시장의 결과로 보고, 직원의 초과보상은 공정성과 자격의 문제로 본다. 그래서 생산직의 초과이익에 대해 사회 전체의 신경이 곤두선다. 그 틈새를 학력주의가 교묘하게 파고든다. 운에 의한 초과이익도 학력 서열에 따라 차등지급해야 한다는 식이다.
하이닉스 직원들이 얼마를 받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우리는 노동자가 많이 받는 장면에는 쉽게 분노하면서, 자본이 훨씬 더 많이 가져가는 장면에는 무덤덤한가. 한국 사회의 공정성은 정말 불평등 자체를 문제 삼는가. 아니면 ‘닭장 속 서열’을 지키는 데에만 작동하는가.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