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이순신의 탄생일이 되면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임진왜란’이나 ‘성웅 이순신’ 같은 제목의 영화를 단체관람했다. 1960~1970년대는 이순신 우상화 작업이 유난했다. 박정희는 유년 시절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탐독하며 그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춘원의 이순신 전기는 식민사관이 내재돼 그 사관이 무의식적으로 박정희의 사고를 지배했다고 여겨진다.
박 정권은 1960년대 이순신의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난중일기>와 <충무공 전기> 등 관련 서적의 출판을 장려하고 이를 학생들의 필독서로 지정했다. 이순신 우상화 작업의 백미는 단연 기념 동상의 건립이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상을 필두로 모두 15점의 동상을 세운 뒤 해체됐다. 이순신, 세종대왕,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계백 등이 그 대상이다. 군사정권의 정서에 부합되는 동시에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인물들을 선별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위인은 특정 시기에 의도적으로 호출된다. 당시 조각가로는 서울대와 홍대 교수들이 참여했지만 개성 없는 구상조각들이 대부분이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은 전신 17.49m로 이순신을 호국선열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는 동시에 박 정권의 자주국방 의지를 간접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광화문에 자리한 이순신 동상은 가장 이데올로기적 조각품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동상이 놓인 위치는 과거의 권력(경복궁, 덕수궁), 현재의 권력(청와대, 정부종합청사),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외세의 권력(미국대사관)과 언론 권력(조선일보, 동아일보 사옥) 등이 밀접하게 집중되는 세종로·경복궁 근처로 이는 권력 담론의 차원에서 명실상부한 ‘한국의 중심’을 대표한다. 박정희는 당시 ‘북괴’의 남한 적화 야욕으로 인한 국가 위기, 국민 총동원의 시기에 자신과 이순신을 동일시하는 전략으로 이순신의 성웅 사업을 추진하는 차원에서 동상을 세웠을 것이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신격화해 얻고자 한 효과는 복합적이다. 이순신의 반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친일 논란을 희석하려 했고 구국영웅의 이미지를 빌려 군인 출신 대통령의 통치를 합리화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무관 출신인 이순신이 국가를 구했다는 서사를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박정희의 군인 이미지를 제고하는 한편, 군 출신인 자신만이 국가를 구할 수 있다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주입하려 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야당 세력을 비판했다. 그는 ‘간악한 조신(朝臣)’들과 이순신의 관계를 당시 야당 세력과 정권의 관계로 치환했다. 여기서 박 정권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민족과 국가를 구하려는 선인 반면, 야당은 조신과 마찬가지로 분열과 당쟁을 일삼는 악으로 묘사했다. 박 정권은 이순신을 애국·애족의 정신과 예지, 용기를 갖춘 위인으로 신격화하고, 자신들을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만이 진정한 애국자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고자 했다.
돌이켜보면 박정희 정권에서 문화예술은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강제된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미술계를 움직인 주요 동인은 국가의 문화정책이었다. 이는 미술을 독재적 정치권력에 조력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 동시에 미술이 현실로부터 이탈해 순수미술로 도피하게 만드는 양상도 나타났다. 기념 동상이나 민족기록화를 제작하던 작가들이 전시장에서는 추상미술을 발표했다. 이러한 분열적 경향은 오랜 시간 한국 미술계를 지배했다.
박영택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