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데뷔하지 못한 영화감독 준비생 황동만은 잘난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안 풀려 시기와 질투로 미쳐버리기 직전인 인간이다. 영화 동아리 선후배 모임인 ‘8인회’에서 유일하게 꿈을 이루지 못한 그는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짓눌려 산다. 모임 멤버인 박경세는 영화 데뷔에 성공했지만 황동만과 비슷한 심리를 갖고 있다. 누가 잘되면 괴롭고, 남의 실패에 안도한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무력감을 떨쳐내기 위해 허우적대는 인간들이지만, 내면에는 똑같은 감정이 들어 있다. 인정 욕구다. “불안하지 않은 거. 그냥 불안하지만 않으면 돼, 난.”(황동만) 우리는 흔히 불행을 가난이나 실패에서 찾지만, 더 깊은 불안은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성공이 때로는 내 실패보다 더 상처가 된다.
SK하이닉스 직원 “인생 달다”
반도체 호황으로 격차를 체감
성과가 구성원의 것만은 아냐
사회 기여로 환원 방안 고민을
요즘 한국 사회에서 그 감정선을 제대로 건드린 게 반도체 산업이다. 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 시대의 최대 수혜자가 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연간 영업이익은 수백조원, 성과급은 수억원에 이를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생 달다”는 SK하이닉스 직원의 한마디가 직장인 커뮤니티를 뒤흔든 것은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 비슷한 성적을 받고, 비슷한 노력을 했으며, 어쩌면 나보다 덜 치열해 보였던 친구가 어느 회사에 들어갔느냐에 따라 인생 경로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삼성전자 노조조차 “성과급을 올려달라”고, 삼성전자 주주들은 “그건 재산권 침해”라고 목청을 높인다.
<모자무싸>에 나오는 인물들도 비슷하다. 그들은 거대한 실패를 겪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며 무너진다. 누구는 결혼했고, 누구는 승진했고, 누구는 집을 샀다. 나는 여전히 제자리인데, 세상은 나만 두고 앞으로 가는 것 같다. 현대인의 불행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위치에서 비롯된다. “나는 왜 저 자리에 못 가지?”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든다. 부동산과 코인, 주식 등 자산 급등기에 만들어지던 ‘포모(FOMO·나만 뒤떨어진다는 두려움)’와 ‘벼락거지(상대적 박탈감)’라는 감정이 이제 직장으로 옮겨붙었다. 의학 계열 전공들의 앞글자를 딴 ‘의치한약수’에 반도체 학과를 추가한 ‘의치한반약수’라는 말이 등장하고, SK하이닉스 입사를 위한 학원까지 생겨났다.
문제는 그 역대급 돈 잔치가 우리 사회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반도체 공장 인근 상권은 기대만큼 살아나지 못했고, 성과급의 상당 부분은 소비 대신 투자처로 흘러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고소득층(소득 상위 20%)은 새로 늘어난 소득 중에서 12%만 소비에 쓰고 나머지 88%는 저축이나 재투자를 한다. 주식과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간 돈은 다시 자산 격차를 키운다. 성장의 열매가 고루 퍼지지 않고 소득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K자형 성장이다.
기업의 성과를 무조건 사회적으로 재분배하자고 할 순 없다. 기업이 투명한 규칙에 따라 이익을 나누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그 성과가 오롯이 구성원만의 것인가는 따져볼 문제다. 이번 호황은 AI라는 시대적 흐름과 국가적 지원, 수많은 협력사가 맞물려 돌아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특정 산업의 호황이 특정 집단만의 ‘신분 상승’으로 귀결될 때, 노동시장 전체는 더욱 계급화될 수밖에 없다. 대기업 안에서도 ‘삼성(전자 말고)후자’와 ‘SK(하이 말고)로우닉스’로 나뉘고, 중소기업 노동자는 아예 딴 세상 사람 같은 벽을 체감하는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기업은 성과급의 일부를 협력사와 공유하거나 사회적 기여로 환원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정부 또한 이 격차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심화하지 않도록 세제와 복지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시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소득만으로 존엄을 지킬 수 있고, 어느 산업에 속했느냐가 계급이 되지 않는 사회다. 누군가의 성공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무가치함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저 기뻐만 할 일은 아니다.
이주영 기획콘텐츠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