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만이 안다. 용상에서 내려오고 궁에서 쫓겨나 물길과 산길 따라 유배지로 향하는 이의 정확한 심정을 뉘라서 알랴. 아니다, 정확하다는 게 세상에 있기는 할까. 그건 앎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겨우 정확한 건 그가 영월에 발 디뎠고, 청령포에 고립되었다가, 사약을 먹고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뿐.
영월의 선돌(立石)은 단종의 가묘인 장릉 근처에 있는 빼어난 경관이다. 우뚝 솟은 바위로 훌쩍 건너뛰어 식생 조사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수직의 선돌 아래 둘레길로 내려가 석회암 지대가 빚어내는 희귀식물들을 관찰했다. 토끼풀 꽃잎에 얼비치는 붉은 무늬를 누가 흘린 피의 흔적이라고 상상해 보는 건 이 현장이 바로 단종 유배길이기 때문이다. 서울 쪽으로 말없이 흐르는 서강. 이를 거슬러 또 발길을 재촉했을 심사를 부질없이 헤아리다 길게 한숨 쉬고 일어서면 가시가 정말 특별하도록 길쭉하게 발달한 나무가 가슴을 찔렀다.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사용했다는 탱자나무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시무나무.
꽃이 아니라 글을 찾아 영월행. 노자 공부 모임의 봄소풍에 끼었다. 한학의 고수들께 귀동냥한 뒤 아침 산책. 동강 둔치에서는 단종문화제 준비로 아연한 활기를 띠고 있다. 작년 차창으로 얼핏 스쳤던 한 풍경을 찍으러 가는 길. 동강대교 건너 로터리에 이르자 아, 아직 그대로 있다.
‘영월장례서비스’ 간판에 적혀 있기를. 이장/개장/파묘/산소관리/유품정리/벌초대행. 초상은 한자로 初喪이다. 그러니 이제 겨우 처음 죽는다는 뜻인가. 그래서 한번 죽는다고 다 끝난 게 아닌가. 첫 죽음 이후, 더 치러야 할 절차가 저리도 굵직하게 많구나.
그이의 길은 그이만이 갈 수 있다. 어려서 임금이었으니 <논어>는 진즉에 읽었을 터, 터덜터덜 유배길에서 이런 문장이라도 위안이 되었을까.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 죽은 후에라야 그만둘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먼가(任重而道遠. 死而後已, 不亦遠乎).” 아무도 모른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그날 죽은 이는 물론 죽었고 죽인 이도 죽었다. 그때 살았던 이는 기억 속에 또 죽었다. 그때 죽은 그 사람만 이렇게 먼 곳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