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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수리하자

입력 2026.04.30 20:00

수정 2026.04.3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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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룸메이트는 아이폰을 쓰고 나는 삼성폰을 쓴다. 두 휴대전화는 같은 영장류에 속하지만 침팬지와 보노보가 다르듯 충전기가 달랐다. 고로 우리는 집에서도, 같이 여행을 가서도 각각의 충전기를 챙겨야 했다. 그런데 최근 룸메이트가 7년간 쓰던 구형 아이폰을 최신 아이폰으로 교체하면서 거실에 충전기를 하나만 두고 같이 쓰게 됐다. 아이폰이 아이폰만의 고유한 충전 단자를 포기하고 다른 기계와 호환되도록 디자인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무스하게 될 것을, 그간 아이폰은 왜 그토록 독자적인 충전 방식을 고집해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군말 없이 바꾼 이유는 쉽게 알겠는데 ‘브뤼셀 효과’ 덕분이리라. 유럽연합 의회가 자리한 브뤼셀에서 결정된 정책이 전 세계 국가와 기업의 표준이 되는 현상을 ‘브뤼셀 효과’라고 한다. 예전엔 유럽연합 내 홈페이지에서 뭘 사거나 예약하면 보험 신규 가입하듯 개인정보 동의란이 좌르륵 떴다.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바로 유럽연합의 개인정보 규정이 세계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의 화학물질 규제법인 ‘리치(REACH)’는 가습기살균제 사고 후 한국의 K리치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에코디자인 차례다. 유럽연합은 전자 폐기물 감축과 소비자 편의를 위해 2024년부터 모든 소형 전자기기에 동일한 충전 단자를 의무화했다. 아이폰은 유럽연합과 비유럽연합 제품을 따로 제조하는 대신 표준화된 충전 단자로 제품 설계를 변경했다. 내년부터는 더 큰 변화가 온다.

‘라떼는 말이지’ 배터리가 닳으면 벽걸이 시계 건전지 교체하듯 휴대전화 뒤편 뚜껑을 열고 새 배터리로 갈아 끼웠다. 휴대전화에 수액처럼 보조배터리를 매달고 사용할 일이 없었다. 최근 내 휴대폰 보조배터리가 제 무게를 못 이겨 단자 부분만 쏙 빠져버렸을 때, 나는 왕년의 탈부착식 휴대전화가 격하게 그리웠다. 배터리 단자 부품을 구해 배터리를 열고 납땜을 해서 고치면 된다는데, 아마 사람들은 단자만 바꾸면 되는 멀쩡한 배터리를 버리고 새 배터리를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년부터 유럽연합은 사용자가 쉽게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는 휴대폰과 태블릿을 의무화하고 제조사는 5년간 배터리를 공급해야 한다. 브뤼셀 효과가 아이폰 단자를 바꾸었듯 배터리 탈부착형 휴대전화가 당연해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이쯤 되면 사대주의고 뭐고, 나는 고장 난 배터리를 손에 쥐고서 브뤼셀 쪽으로 절이라도 올리고 싶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손님이 의뢰한 낡은 루이비통 가방을 리폼한 수선집 기술자를 상표권 침해로 고소한 사건이 있었다. 1심 재판에서 1500만원을 루이비통에 배상하라는 유죄 판결이 나왔는데, 이런 논리라면 입던 청바지로 가방을 만들어도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리폼을 금지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루이비통은 김앤장을 고용해 한국의 수선 기술자를 고소했고, 대법원 항소심까지 가서야 상표권 침해가 아니라는 판결이 났다. 최대한 쉽게 버리고 최대한 빨리 새 물건을 사도록 설계된 세상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유럽의 에코디자인법을 반영한 K에코디자인 법안이 한참 논의 중이다. 서명을 부탁드린다.

▶[서명]나는 고쳐 쓰고 싶다! 수리할 권리를 위한 시민행동 https://campaigns.do/campaigns/1808

고금숙 플라스틱프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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