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입증 책임 사용자에게’ 근로자추정제
소상공인단체 “퇴직금·연장수당 지급 부담”
지난 2월1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일하는 사람 기본법 관련 입법토론회에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의 축사 영상이 나오고 있다. 정효진 기자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동절 이전 처리를 공언했던 근로자 추정제 도입 법안이 결국 시일 내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소상공인 단체와 경영계 반발 속에 4월 임시국회 논의가 멈췄다. 노동절을 앞두고 ‘법 밖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던 정부 구상에 제동이 걸렸다.
대구의 미용실에서 일하는 20대 헤어디자이너 A씨는 세 개 지점을 오가며 근무했다. 매출 보고는 하나의 단체 채팅방에서 했고, 교육도 지점을 넘나들며 받았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서로 다른 사업장이었다. 급여도 두 지점에서 나눠 지급됐다. A씨는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권리 구제를 요구하고 있다.
서울의 한 반려견 미용 전문점에서도 5명의 미용사가 계약서 없이 기본급을 받으며 일했다. 사업주가 출퇴근과 업무를 지시했고, 고객 응대와 예약 관리도 모두 매장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들이 권리 구제를 신청하자 사업주는 돌연 프리랜서 계약서 작성을 요구했고, 이들이 직원이 아니라 매출에 따라 수익을 나눠 가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며 이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업장을 쪼개거나 ‘무늬만 프리랜서’로 위장하는 관행은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은 30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 사례를 공개했다. 실질적으로는 직원처럼 일하는데 사업주가 이들을 사업소득세 3.3%를 원천징수하는 개인사업자로 둔갑시켜 최저임금, 퇴직금, 4대 보험 등 기본 권리 보장 의무를 회피하는 ‘가짜 3.3’ 문제다.
현행 제도에서는 퇴직금 등을 받으려는 노동자가 직접 자료를 확보해 노동청이나 재판에서 근로자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계약서, 출퇴근 기록, 업무 지시 내역 등 핵심 자료는 사용자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가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면 ‘객관적 자료 부족’이라는 이유로 권리 구제에서 밀려날 수 있다.
근로자 추정제는 이런 구조를 바꿔 실제로 노무를 제공하면 우선 근로자로 보고, 근로자가 아니라는 입증 책임을 사업자에게 지우는 제도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를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한정한다. 이 때문에 배달기사,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플랫폼 종사자는 보호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노동법 밖 노동자는 2019년 669만명에서 2024년 869만명으로 늘었다.
노동계는 당초 근로기준법 제2조의 ‘근로자’ 정의 자체를 개정해 법 적용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계약 형식과 무관하게 실질적으로 종속된 노동을 제공하면 근로자로 인정되도록 법적 기준을 바꾸자는 취지다. 그러나 이 경우 적용 대상이 급격히 확대될 수 있다고 경영계가 반발해 추정제 방식으로 축소됐다.
2월 1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일하는 사람 기본법 관련 입법토론회에서 소상공인연합회 관계자들이 반대 피켓을 들고 있다. 정효진 기자
그럼에도 법안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함께 추진된 ‘일하는 사람 권리 보장 기본법’도 노동절 전에 처리되지 않았다. 이 법은 계약 형태와 관계없이 모든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선언하는 기본법으로, 개별 노동관계법을 직접 바꾸는 효력은 없다. 정부는 이 법을 토대로 고용보험·산재보험·산업안전보건법 적용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이었지만, 출발 단계부터 막혀 있다.
소상공인 단체는 두 법이 도입될 경우 퇴직금, 연장수당, 4대 보험 등 인건비 부담이 커져 폐업이나 고용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야권도 “사업주 부담이 과도하게 커진다”며 반대 의견을 내놨다. 반면 노동계는 “민사소송에 한정된 제한적 제도에 불과하다”며 과도한 우려라고 반박한다. 실제 법안 구조상 사용자 책임이 즉각·일괄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분쟁에서 입증 책임이 전환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여권은 법안을 신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인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아직 구체적 일정이 잡히지 않은 상태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동계에 여러 사건이 많아 법안 심사가 빠르게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내부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있다”고 밝혔다.
노동절이 법정 공휴일로 바뀐 지금도 ‘가짜 3.3’과 사업장 쪼개기 같은 편법 속에서, 노동자들은 여전히 스스로 ‘근로자’임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