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차돌박이를 즐긴다. 구이는 물론 생고기도 즐긴다. 살짝 구워 비빔국수와 함께 먹기도 한다.
차돌박이란 이름은 하얀 지방이 살코기 사이 차돌처럼 단단하게 박혀 있는 모양에서 왔다. 차돌박이 지방은 결합조직과 근간지방으로 이루어져 단단하고 식감이 독특하다. 이런 식감과 기름진 고소한 맛에 반해 나는 차돌박이에 최근 입문했다.
차돌박이는 전통적으로 수육으로 즐기던 부위다. 조선시대 조리서인 <시의전서>에 차돌박이가 붙어 있는 양지머리를 소고기 수육의 으뜸으로 꼽을 정도였다. 수육용 차돌박이가 구이로 변신한 것은 1960년대였다. 전쟁의 공포에서 한시름 놓은 사람들이 구운 소고기를 갈망했지만 당시 구이용 소고기는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 용산에서 국밥을 팔던 가게들이 국물용 양지머리를 1.5㎜ 정도로 얇게 잘라 구이로 내기 시작했다. 고기를 얇게 썬 것은 기름기가 많은 차돌박이를 두껍게 썰어 구우면 질겨지는 탓이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연탄불에 즉석에서 구워 먹는 차돌박이의 고소함에 대중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지금도 구이요리의 한 장르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자의 구이용 소고기’인 차돌박이는 소고기 요리의 왕인 스테이크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스테이크는 두툼하고 차돌박이는 얇디얇다. 스테이크는 굽고 소스를 조리는 데 시간이 꽤 걸리지만 차돌박이는 몇초만 구우면 끝이다. 게다가 스테이크는 수프, 샐러드, 그리고 몇 가지 코스를 거쳐야 등장한다. 추상적인 의미의 시간은 더 필요하다. 스테이크와 거기에 같이 따라다니는 레드 와인에 지갑을 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소고기 스테이크가 가격을 넘어 사회적 권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 자본’으로 이름을 올린 까닭이다.
나는 다행히도 이런 환상에서 자유롭다. 스테이크의 판타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던 것은 유럽에서 요리를 배운 경험이 컸다. 유럽에서는 스테이크보다 메추리, 뿔닭 같은 진귀한 새 요리를 더 쳐준다. 새 요리에 대한 선호는 중세 유럽에서 귀족만이 사냥을 할 수 있었던 계급적 구분 짓기에 뿌리를 둔다. 이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더 우아한 방식으로 계승돼 유럽 왕실에 큰 영감을 줬다. 그래서 유럽 레스토랑에 가면 소고기 스테이크가 메인 메뉴에 없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당시 내 입에 스테이크보다 더 맛있었던 것은 가난한 서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만든 염장 햄인 프로슈토였다. 질겨서 인기 없는 돼지 뒷다리에 소금을 뿌려 보통 1년을 숙성해 얇게 썰어 빵에 올려 먹는다. 소금만 뿌려 숙성시킨 프로슈토의 감칠맛은 연탄불에 찰나적으로 굽는 차돌박이의 고소함과 역설적으로 닮아 있다. 두툼한 스테이크라는 케케묵은 상징을 거침없이 베어버리는 얇음의 맛이다.
차돌박이를 자주 즐기다 보니, 늙은 소의 차돌박이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든 소의 차돌박이는 지방이 노랗다고 한다. 풀의 카로티노이드 같은 파이토케미컬이 응축돼 있어서다. 대지와 시간의 풍미가 가득한 차돌박이를 몇 점만 구워 눈개승마나 곤드레나물 같은 쓴맛 나는 봄나물에 얹어 먹어보고 싶다. 엉성한 상징이나 차가운 산업적 결과물로의 소고기가 아니라 의미 있는 소고기를 맛보고 싶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